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8월은 소리가 살아나는 달

권영상 2014. 8. 16. 19:41

8월은 소리가 살아나는 달

권영상

 

 

 

 

 

4월은 잠자던 눈이 살아나는 달이다. 삼동을 지나오며 우리의 눈은, 설원의 백설이거나 벌거벗은 대지 이외의 것을 본 적이 없다. 사람의 의상으로 치자면 겨울은 모노 패션이다. 단조롭다. 그런 단조로운, 오늘이 어제 같은 날이 무려 서너 달씩이나 반복된다.

이 지리한 모노컬러의 절기는 우리의 눈을 잠들게 한다. 휴면에 들게 하는 거다. 농경민족의 겨울엔 시력이 그리 필요하지 않다. 바깥 보다 좁은 방안에 거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눈은 바깥을 향하기보다 고요히 내면을 응시하기를 더 좋아한다. 육신의 눈보다 마음의 눈이 더 밝아지는 때가 이때다.

 

 

 

그러다가 4월이 오면 눈은 파랗게 살아난다. 4월은 산뜻하고 깜찍한 빛깔을 가지고 온다. 작고 예쁘고 앙증맞은 형상의 빛을 대지 위에 점점이 뿌려놓는다. 보랏빛 제비꽃이거나 노란 금단추 민들레꽃이며 밥풀 같은 양지꽃, 그리고 통통한 나뭇가지마다 팝콘처럼 터트리는 꽃들과 마음을 설레게 하는 연둣빛 속잎.

 

 

 

4월은 방안에 갇혀 지내던 사람들을 대문 밖으로 내쫓는다. 나들이하기 좋은 달이다. 혼자 걸어도 좋고, 둘이, 또는 셋이 걸어도 좋다. 산보할 길을 찾느라 고민할 필요가 없다. 집 밖을 나가는 순간 우리의 두 눈은 마치 유치원 아이의 눈처럼 밝고 신나고 호기심으로 빛난다. 아무리 나이 먹은 이라 할지라도 4월이 만들어내는 빛깔에 놀라지 않을 사람 없고, 그 눈부신 생명의 부활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사람 없다. 냉이 노란 꽃이 가벼운 바람 물결에 흔들리는 논두렁길을 걸어도 좋고, 산모롱이에 몰래 피는 진달래꽃 곁을 걸어도 좋다. 그도 아니라면 시골집 개나리꽃이 한창인 돌담길을 걸으며 느닷없이 바람에 지는 살구꽃을 보아도 좋다.

4월은 그동안 밀렸던 빛깔 잔치를 우리들 앞에 펼쳐 보인다. 종합 선물세트 같은 빛의 선물로 우리의 눈을 새롭게 살아나게 하고, 육신을 벅차오르게 한다.

 

 

 

그런가 하면 8월은 침묵하는 달이다.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매미 소리를 잊었느냐고 누가 힐책할 것 만도 같다. 그러나 폭염에 지친 사람들은 귀청을 때리는 매미소리에 귀 기울이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쩌렁쩌렁 숲을 울리는 매미 소리도 실은 우리의 청각 바깥에 있다. 그러나 이 8월도 잠깐!

태양의 그림자가 8월 중순의 오솔길을 건너기 무섭게 가을빛은 이내 들어선다.

어두운 밤, 창을 열면 풀벌레 소리가 더위에 지친 귀를 신선하게 연다. 8월은 침묵과 동시에 귀가 살아나는 달이다. 거친 폭력과도 같았던 매미소리, 청각을 위협하던 뇌성벽력, 지칠 줄 모르게 주먹을 날리던 수수밭의 장대 빗소리, 질주하던 태풍과 골짝을 가득히 메우며 콸콸콸 쏟아져 내리던 계곡의 물소리......

 

 

 

 

이들의 거친 소리에 지칠 대로 지친 귀는 8월의 중반을 지나면서 나직하고 음률이 고른 소리에 청력을 모은다. 여린 소리에 귀를 열어 우주의 발걸음을 고요히 엿듣는다.

그 무렵의 대표적인 소리는 뭐니 뭐니 해도 풀벌레 소리다. 낮은 곳에서 신음하는 이들의 고통이 다르듯 풀벌레소리도 저마다 색깔이 다르다. 스뻬스뻬스뻬 울거나 달달달달 울거나, 짜로짜로짜로 울거나, 또르랑또랑 운다.

뜰앞 고욤나무 우듬지에 달이 뜰 때까지 귀는 그들 곁에 머문다. 귓속 소리창고도 모자라 귓바퀴 가득 청랑한 가을 소리를 채운다.

 

 

 

8월은 청력을 복원하는 달이기도 하다.

감나무가 툭 떨어뜨리는 풋감 소리에 퍼뜩 귀를 보낸다. 토란잎을 도닥이며 한 줄금 지나는 소낙비 소리에도 귀를 보낸다. 잠자는 아가의 숨소리에도, 별똥별 스치는 소리에도 퍼뜩 귀를 보낸다. 늦은 밤, 꽃씨 떨어지는 소리에도.

이처럼 귀 밝히는 소리를 찾아들으면서 청력은 복원된다. 8월이 다 갈 때면 귀는 내 안의 소리에 고개를 돌린다. 그때가 소슬바람 부는 9월의 밤이다. 그때를 위하여 늦은 8월은 예민한 영혼의 귀를 살려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