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어떻게 모르는 척해

권영상 2014. 7. 31. 10:42

어떻게 모르는 척해 

권영상

 

 

 

 

딸아이가 고3일 때다. 지금도 나는 그때 그 일을 잊을 수 없다. 그때가 정확히 1학기 중간고사를 이틀 앞둔 날이었다. 서너 달 뒤면 대입 수시원서를 써야할 만큼 중간고사는 중요했다. 그땐 나도 집사람도 세상의 모든 고3 부모들처럼 공부에 방해가 될까봐 텔레비전도 못 켜고 살았다. 평소엔 공부가 인생의 전부냐고 큰소리쳤지만 막상 닥치니 달랐다.

중간고사를 이틀 앞둔 오후부터 봄비가 심하게 내렸다. 학교 공부를 마치면 집에 와 저녁을 함께 먹던 딸아이가 두 시간이 지나도록 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결국 전화를 했다. 받지 않았다.

 

 

 

“낼 모레가 시험인데 어디서 뭘하고 있는 거지.”

꾹꾹 참던 아내가 결국 한 마디 했다. 오겠지 뭐, 하던 내 입에서도 왜 안 오지? 그 말이 절로 나왔다. 그동안 나는 우산을 들고 아파트 정문 앞에서 몇 번이나 딸아이를 기다렸다. 창밖을 내다보던 아내의 손에서 드디어 휴대폰이 울었다.

“어디라고? 아니 네가 정신이 있는 거니?”

 빨리 들어오라며 아내가 전화를 끊었다.

 

 

 

“걔 당신 닮은 거 아니야? 도대체 왜 그런대.”

식탁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아내가 한숨부터 내쉬었다. 친구가 강아지를 잃어버렸는데, 그 강아지를 찾느라 비 맞으며 양재역 근처 골목을 헤매고 있다는 거였다. 그것도 두 시간씩이나. 순간 내 머리가 좀 어지러웠다. 아내와 나는 이 어처구니없는 딸아이의 행동을 두고 네 탓이네 내 탓이네 푸념을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초인종을 울리며 딸아이가 돌아왔다. 

“친구네 강아지긴 하지만 찬 비를 맞으며 헤맬 걸 생각하니 그냥 올 수 없었어.”

교복이며 머리칼이 흠뻑 젖은 얼굴로 딸아이가 울먹였다.

“아니, 네가 지금 한가하게 남의 강아지 걱정할 때니?”

드디어 아내가 언성을 높였다.

“친구 마음이 아플 텐데 어떻게 모른 척 할 수 있어.”

딸아이는 젖은 머리를 털고 제 방으로 들어갔다. 순진하다고 해야 되나, 덜 떨어졌다고 해야 되나, 아니면 바보 같다고 해야 되나. 

 

 

 

그 일로 중간고사 성적이 어떻게 나왔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떻든 딸아이는 수시 전형에 합격했고, 이 사건의 에세이를 보낸 덕분인지 제가 원하던 미국 대학에도 합격했다.

그 딸아이가 유학을 마치고 국내에 들어와 직장을 다니다가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요 며칠 전이다. 싫다 좋다를 분명히 하지 못하는 내게 딸아이가 충고했다.

“아빠의 이익을 먼저 생각해. 그럼 판단하기도 쉽고 그 판단을 끝까지 지켜낼 수도 있어.”

딸아이 말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

딸아이는 그 사이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길 잃은 강아지를 위해 자신의 성적쯤 기꺼이 포기하던 딸아이가 차가울 정도로 자기 것을 챙기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왜 딸아이의 그런 야박스런 말에 마음이 놓이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