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시도란 아름다운 설렘입니다

권영상 2014. 7. 26. 09:55

 

 

시도란 아름다운 설렘입니다

권영상

 

 

 

애벌레가

곰곰 생각 끝에

참나무 껍질을 뚫고 나왔다.

 

 

아, 이 눈부신 햇빛!

 

 

곰곰이 생각하길

참 잘했다.

 

 

 

‘딱정벌레의 봄’ 이라는 내 동시입니다. 올 12월쯤에 나오게 될 동시집의 제일 첫 페이지에 앉히게 될 시입니다. 첫 시를 보면 그 시집의 전체적인 분위기나 색깔, 톤, 주제를 알 수 있지요. 세상이 아무리 아프고 고통스럽고 힘들다 해도, 그래도 이 세상에 태어나길 잘 했다는 긍정적인 내 삶의 방식이 묻어난 시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번쯤 이 세상에 태어난 것에 불만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을 부정하고 또 부정하다가도 그 고통의 시기가 지나면 밉지만 자신을 받아들이는 게 사람입니다.

 

 

 

이번에 탈탈 털어 보낸 52편의 동시들은 어쩌면 이 시의 줄기에서 가지가 뻗고, 잎사귀가 펼쳐지게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52편을 보내놓고 출판을 기다리는 내 마음은 그리 편치 않습니다. 다른 때 같으면 기대감으로 설레고 흥분될 터인데 이번은 다릅니다. 권수로 치면 동시집만 16번째입니다. 이제는 내가 쓴 시에 좀 뻔뻔해질 만도 한데 왠지 마음이 자꾸 불편합니다. 

그 까닭은 이 이전에 나온 <엄마와 털실뭉치>와 차별성이 뚜렷하게 없다는 겁니다. 그동안 편집자와 여러 차례 만났지요. 편집자도 그 점에 대해 약간 우려하고 있었지요. 작품집이 살려면 분명히 그 앞의 시 세계나 시 작법과 결별해야 합니다. 시집 안에 좋은 시가 많이 들어 있느냐 없느냐 그런 것보다는 시가 얼마나 낯설어졌느냐가 중요합니다. 늘, 그 나물에 그 밥인 그냥 편한 방식으로 그럴 듯한 시나 쓰며 살기로 한다면 그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습니다. 

 

 

 

바로 앞에 ‘사계절출판사’에서 나온 <구방아, 목욕가자>나 ‘문학과 지성사’에서 나온 <엄마와 털실뭉치>는 컨셉이 분명했습니다. 괜찮은 시는 많지 않았어도 ‘가족’이라는 컨셉을 가지고 시를 전개해 나갔습니다. 가족 구성원과 주인공이 있고, 가정이라는 배경이 있고, 그들이 서로 부딪히며 살아가는 갈등이 있었습니다. 마치 한권의 가족을 다룬 장편동화 같은 동시집이었습니다. 그건 나의 오랜 고민 끝에 얻어낸 새로운 시도였지요.

 

 

 

이번 동시집엔 세월호를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순정한 목숨들이 아무 이유도 없이, 어른들과 세상의 부조리 때문에 참혹하게 희생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세상이 참혹한 곳이라 해도 내 앞에 쏟아지는 ‘이 눈부신 햇빛’만으로도 살아볼만한 곳임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새로운 시도가 아닙니다. 충격적인 사건을 시 속에 들여온 것일 뿐, 시의 형태나 작법을 진화시키려는 의도가 부재했습니다.

정면으로 시에 도전하는 자기 변신의 치열한 시도가 없었다는 거지요.

 

 

 

펜실베니아에 살고 있는 내 친구, 류형은 요새 내게 문학이 무엇인가를 은근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류형은 지난 금요일, 롱우드 가든의 가시연꽃을 찍으러 필라델피아로 내려갔다가 새벽 2시에 북상했습니다. 미 동부 아케디아 국립공원에서 해 뜨는 바다풍경을 잡고 싶었던 거지요. 그것을 위해 그는 무려 14시간 동안 동부 해안선을 따라난 95번 하이웨이를 타고 최북단 아케디아에 도착했습니다.

그가 그날 밤 11시에 도착하도록 밤길을 달려간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위에 부딪혀 부서지는 파도를 슬로우 셔터로 잡아보겠다는 우직스런 시도에 대한 욕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진작가가 아닙니다. 물론 프로도 아닙니다. 자신의 직업을 따로 두고 카메라에 빠진 아마추어입니다. 그는 자신의 동네 골짜기 물이며 계곡 폭포를 대상으로 이미 여러 날 슬로의 셔터를 다룬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셔터 속도를 1초로 맞추거나 6분의 1로 맞추어 폭포수가 물안개처럼 부드러운, 천천히, 폭포수가 떨어지는 1초간의 부드러운 속도를 사진 속에 옮기는 시도를 했었지요.

 

 

 

그런 시도가 끝나면 자연히 순간적으로 솟구쳐 오르는 파도에 관심이 갈 테지요. 파도라면 계곡물과 달리 200분의 1의 셔터 속도가 요구될 테지요. 아니 렌즈에 들어오는 빛을 줄여주는 ND 필터를 사용했다고 했으니 5초나 10초간의 슬로우 셔터를 시도했겠군요. 류형은 거기에서 돌아와 내게 ‘부서지는 파도’ 이미지를 내게 이메일로 보내왔습니다. 그 작품엔 파도가 밀려오는 10여초의 시간과 바위에 부딪혀 튀어 오르는 물방울의 선명한 정지가 눈에 띄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실력을 얕보는 게 아니라 실은 이런 사진이란 웬만한 작가의 작품엔 흔하게 나오는 테크닉입니다.

 

 

 

시도란 그렇습니다. 남의 눈에는 그저 대수롭지 않은 변화로 보일테지만 그것은 그의 그 이전의 사진 어디에도 없던 변화임이 분명합니다. 단지 파도치는 바다를 찍은 사진이군! 그러고 말면 그만이지만 그는 그 촬영 기법을 시도하기 위해 남들 다 잠든 밤을 14시간 동안이나 달렸다는 것을 알면 달라집니다. 자기 변모란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조차도 생의 변화를 꿈꾸게 하기 때문입니다.

내게는 그 ‘14시간’의 잠을 안자는, 새로운 시도를 위한 고민과 열정이 이번에는 없었습니다. 그동안 나는 그 이전에 다루었던 기법을 좀 더 숙련시켜 그럴듯한 시를 쓰는 일에 안주하느라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했던 거지요.

 

 

 

시나 사진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모든 예술이, 아니 사람 사는 일이 다 같습니다. 새로운 시도로 찍어놓은 사진이 남들 보기엔 그저 그런 사진 같듯이 새로운 시도로 시집을 묶어놓고 보면 그 안엔 충실하지 못해 성근 시들이 많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 성근 시를 보면서 이것이 시인의 새로운 시도임을 금방 눈치 챕니다. 가끔 일상의 친구들 한테서도 그런 경우를 봅니다. 평소에 그답지 않은 언행을 할 때이지요. 그럴 때면 나는 그가 내부적으로 뭔가 새로운 상황에 봉착해 있구나 하고 낯설어 보이는 그를 이해하려고 합니다.

시도란 아름다운 설렘입니다. 그것은 마치 긴 여행자가 날마다 즐기는 낯설음과 같습니다. 세계를 넓히는 거지요. 자신을 새로운 나로 창조하는 일이지요. 시도가 없다면 이 세상은 또 얼마나 지루할까요. 나는 아마추어 작가인 류형에게서 그 사실을 배웠습니다.

 

숲속 참나무 둥치에

딱따구리가

호주머니를 만들었다.

 

 

다 자란 봄이

참나무 호주머니에서

 

 

폴짝!

폴짝!

폴짝!

 

새끼 딱따구리를 꺼낸다.

 

 

이번에 출간되는 내 동시집의 맨 마지막에 앉혀놓은 ‘폴짝, 폴짝, 폴짝’이라는 동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