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와 함께 감자 캐기
권영상
하지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가 다가오면 안성에 내려와 사는 내가 할 일이 있다. 감자를 캐는 일이다. 지난 4월, 아버지 기일에 강릉에 내려가 감자씨 한 봉지를 얻어왔다. 형수님께 씨 감자 열 개만 달라고 하자, 그거 세고 있느니 그냥 되는대로 가져가라며 한 봉지 담아주셨다.
잠깐 잠깐 혼자 내려와 살다가는 안성에 지난해 가을, 삽으로 잔디 마당을 뒤집어 밭을 만들었다. 거기 손가락만한 다섯 이랑에 가져간 감자씨를 심었다. 새로 만든 땅이어서 감자가 쑥쑥 자라지 못했다. 그래도 물을 주며, 그 옛날의 아버지처럼 애지중지 감자밭 김을 매고, 이랑 사이에 강낭콩을 심어 키웠다.
“이번 주 토요일이 하진데 안성 내려갈 수 있을까?”
나는 아내의 마음을 슬쩍 살폈다.
“한가하게 감자 캘 시간이 어딨다구!”
아내가 대뜸 고개를 저었다.
직장 일을 집에 가져와 할 정도로 일이 많은 건 나도 안다.
“애도 바빠. 선배들 졸업작품에 출연하느라 맨날 늦게 오는 거 알지?”
대학원 선배 뮤지컬에 출연하느라 요새는 자정이 가까워야 집에 들어왔다. 그렇기는 해도 딸아이에게 감자를 캘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다. 내가 키워놓은 감자를 딸아이와 함께 감자 이랑에 앉아 수확하는 기쁨, 나는 아직 그런 구닥다리 같은 부녀간의 정에 집착하며 산다. 딸아이와 둘이, 아니면 아내와 셋이 감자를 캐는 일은 즐거움 중의 즐거움 아닐까.
이번 주가 안 되면, 하고 나는 달력을 보았다. 그러면 다음 주도 안 된다. 다음 주말엔 설악산 소공원에서 대학 모임이 있다. 나는 설악산 등반을 해서 그 모임에 맞추어 갈 생각이었다. 대청봉이거나 마등령을 넘어본지 10년이 넘었다. 그동안 이런 저런 핑계로 매년 한두 번씩 가던 등산을 멈추었다. 백담사에서 오세암으로, 오세암에서 마등령을 넘어 비선대로 내려가 그들과 합류할 계획이었다.
그렇다면 그 다음 주 토요일이어야 한다.
제주도에 태풍이 엄습하고 있다는 뉴스는 벌써 며칠 전부터 있었다. 다음 주면 남해안과 중부지방이 장마 영향을 받을 거라고 했다. 장마가 지면 비에 약한 감자는 땅속에서 썪고 만다.
‘혼자 그냥 캐고 말지뭐. 그게 뭐 대단한 거라구!’
그런 생각도 해보지만 그렇게 딸아이에게 갈 기회를 내가 훌쩍 빼앗기는 싫었다.
안성에 내려와 감자를 심고, 마늘을 심고, 토마토며 홍당무를 심어 가꾸는 이 일을 나는 아버지한테서 배웠다. 나이 스무 살이 넘을 때까지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를 도우며 나도 모르게 배운 거다. 살아오면서 느끼는 거지만 아버지한테서 배운 농사만큼 소중한 게 없다. 나는 퇴직과 동시에 기어이 서울서 그리 멀지 않은 안성에 조그마한 땅을 구해 밭을 만들었다.
고향을 떠나와 공부를 더하고, 30년이 넘도록 문학을 하고, 직장을 다니며 많은 책을 읽었지만 살아오며 내가 흔들릴 때 나를 붙잡아 준 건 그것들이 아니었다. 아버지 곁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배운, 무겁도록 참을성을 요하는 농사 일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딸아이에게 한순간이나마 그걸 경험하게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그러고 싶다고 다 뜻대로 되는 건 또 아니었다.
나는 하지가 지난 다음 주 금요일, 설악으로 떠났다. 홀로 용대리에서 민박을 하고, 홀로 수렴동 계곡을 따라난 오솔길을 걸어 오세암에 올랐다. 거기서 다시 마등령을 타고 가 대학을 졸업한 지 40년 만의 동창들을 만나고 돌아왔다.
“혹시 안성 내려가 감자 한번 캐 보지 않으련?”
나는 또 한 주일을 보내며 딸아이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가야지. 당연히.”
뜻밖에도 딸아이가 선선히 대답했다.
그 바람에 아내까지 덩달아 따라 나섰다. 결국, 가면 될 일을 애가 바쁜데, 공부가 많은 데, 애를 왜 힘들게 해! 그러며 여태껏 딸아이를 감싸온 건 아내였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단 시간에 안성에 내려왔다.
호미를 쥔 딸아이는 너무도 당연한 일인 것처럼 감자밭에 들어섰다. 간단한 설명만으로도 능숙하게 감자를 캐어 나갔다.
“아빠, 나 어디서 오랫동안 감자 캐어 본 사람 같지 않아?”
기분좋은 얼굴로 일을 하며 농담같이 나를 웃겼다.
농사꾼이신 할아버지의 피가 제 몸이 흐르고 있는 것 같다느니, 제 몸이 농사짓기에 너무나 천부적인 골격이라느니, 이담에 저도 감자를 키우며 살거라느니......
딸아이는 거침없이 속마음을 드러냈다. 그런데 그런 성큼성큼 내놓는 딸아이의 말이나 모습들이 내게는 너무도 낯익어 보였다. 지금까지도 말 실수가 많은 내 모습을 닮아있었다. 그렇기는 해도 함께 가식없는 대화를 나눈다는 일이 좋았다. 딸아이가 공부하는 전공이 농사일과는 거리가 먼 예술분야에 가 있는데도 딸아이가 한 말이 장차 이루어질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 네게서 할아버지를 보는 것 같다.”
나는 군소리없이 척척 감자를 캐어나가는 딸아이와 나란히 앉았다. 함께 감자를 캐며 함께 먼지를 먹고, 감자가 나올 때마다 함께 놀라 소리지르고, 흐르는 땀을 닦으면서 나는 바로 내 곁에 있는 딸아이를 느꼈다. 그의 몸에 땅에 순응하는 나의 피가 분명히 뜨겁게 흐르고 있었다.
감자 한 자루를 캐어 데크에 들어다 놓더니, 딸아이가 손을 씻고 길거리에 나간다. 여기저기 마을 집들을 둘러보며 걸어가는 모습이 영락없는 나다.
“아빠, 마을이 조용하고 좋아. 파 심는, 이천이 고향이라는 아주머니와 대화하고 왔는데 좋은 분들이 사는 동네 같아.”
얼마 후, 집으로 돌아온 딸아이가 그랬다.
공부만하는 딸아이에게 그런 사회성이 있었다는 것도 너무 오랜만에 알게 되는 일이었다. 그간에 자식과 부모 사이의 대화란 게 주로 공부, 공부였다.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빈 껍데기 같은 대화만 하며 살아왔는지....... 그런, 대화 아닌 대화를 할 때에 보면 자식이 부모를 전혀 닮지 않은 별종 같이 느껴질 때가 많다. 그러나 그 공부라는 자리에서 떠나와 보면, 그것이 비록 감자를 캐는 일이어도 거기에서 자식이 부모를 얼마나 닮았는지를 알게 되어 놀란다.
나는 감자 자루에서 감자 세 봉지를 만들었다.
딸아이가 보는데서 이웃집을 찾아가 한 봉지씩 드렸다. 도시에서 사느라 나도 이웃을 모르고 여태껏 살아왔다. 사람 노릇하는 모습을 늦었지만 보여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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