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god가 돌아왔다

권영상 2014. 7. 10. 17:53

 

 

 

god가 돌아왔다

권영상

 

 

 

소중한 사람 지켜줄 그 사랑

내 옆에 늘 같은 자리에 있단 걸

몰랐었던 바보 같던

우리가 사는 이야기.

 

 

발라드 ‘우리가 사는 이야기’의 끝 부분이다. 이 끝 부분을 다 듣고, 노래와 함께 울려나오던 연주가 다 끝났을 때, 느닷없이 가슴 가득 밀려오는 외로움. 이 노래엔 깊은 외로움이 있다. 그 외로움은 다른 이들의 걸음을 간신히 뒤쫓아가는 좀은 더딘 듯한 랩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가슴에 멍든 죄를 짓고서도 매일 살아간다. 사랑도 서툴고, 사는 것도 서툴면서 질투라는 무기를 가지고 살아가야한다. 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친구를 짓밟으며 사는 법을 배워온 우리에게 질투란 너무 두려운 무기다. 그럼에도 아무 생각없이 휘둘렀고, 질투없는 인생을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기에 우리의 내면은 죄악으로 더럽혀져 있다.

 

 

 

한쪽에선 사람답게 순수하게 살라하고, 욕심을 버리고 살라하지만 또 다른 한쪽에선 비겁하게 살도록 나를 꼬득이고, 욕망! 욕망을 외치며 뻔뻔하게 살라 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늘 검은 욕망 뒤에 숨어 다른 빛깔의 호흡으로 우리를 위장하며 살았다. 정말 우리는 누구를 위해 살았던가. 우리는 어디에 나를 숨겨놓고, 내가 아닌 가면의 얼굴로 무자비하게 살아왔던가.

그래서 그런지 모르겠다. ‘우리가 사는 이야기’를 다 듣고 나면 왠지 일몰의 종소리처럼 내 빈 가슴을 흔드는 애잔함이라든가 애틋함이 가득 차오름은 본다. 또한 회한의 아픔과 상처도 바라보게 된다. 고음 속에 배어있는 진한 외로움. 끝모르게 올라가는 고음의 절정에서 분출되는 인생의 아픔과 허전함과 외로움. 그것은 마치 빈 들판에서 홀로 노래 부르는 촌로의 아스라한 목청처럼, 멀고 먼 사막을 가는 대상의 마른 목소리처럼 때로 고즈넉하다.  나는 몇 번이고 따라 부르며 노래가 끝나는 침묵의 지점에서 경험하게 되는 생에의 회한을 반추한다.

 

 

 

 

god는 이렇게 돌아왔다. 데뷔한지 15년만이라고 한다. Chapter 8에는 ‘하늘색약속’, ‘우리가 사는 이야기’, ‘새터데이 나이트’, ‘미운 오리새끼’ 등 12곡이 실려있다. 지난 8일 음원을 공개한 이후 실시간 음원차트 10위 안에 무려 5곡이나 랭크되어 있다.

이들이 한창 활동하던 시절, 나는 여자중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여학생들 중에는 god 팬클럽 회원도 있었다. 그들은 밤마다 공연장을 찾아가 늦은 밤까지 열광했고, 공연이 없는 날이면 선물을 들고 그들이 머무는 곳을 찾아다녔다. 그러니까 당연히 수업 시간에는 졸았다. 조는 아이들을 깨워 god를 나무라면 그들은 분노했다. 분노 정도가 아니라 목숨을 걸고 그들을 제몸처럼 지켰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의 학교는 공부에 지치거나 공부에 흥미를 못 느끼는 아이들의 손을 잡아주지 못했다.

 

 

잡아봐 내 오른손이야.

언제든 널 위해 내어 줄 테니

앞만 보고 가. 손아귀 꼭 쥐어준 우정이란 이름 니가 준거잖아.

Thank my friend 내 왼쪽 손이야.

언제든 널 위해 내어 줄테니

걱정 하지마 내 이름을 부르면

그게 어디든 달려 갈테니......

 

 

그러니 당연히 아이들은 학교보다 손을 내미는 god를 찾아나설 수 밖에 없었다.

15년만에 god가 돌아왔다. 그들은 ‘바늘같이 예민한 아들과 아주 삐딱한 딸’을 가진 아빠가 되어 돌아왔다. 아내에겐 남같은 남편이 되어 있고, 가슴엔 아내가 식어가는 나이의 남편이 되어 있다. 그 때의 내가 가르쳤던 여학생들도 벌써 서른 살 엄마가 되어 있을 나이이다. 사는 일에 지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조차 사랑한다거나 고맙다는 말도 못 하고 살아가는 누군가의 아내가 되어 있을 테다. god의 컴백이 이들에게 다시 한번 손을 내밀어 위로하고 소통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사는 이야기'의 외로움 만으로도 어쩌면 외로움은 그들과 공유가 가능하다.

 

 

사랑한단 말 고맙다는 말

가슴 한 켠에 묻어둔 채 살다가

이제서야 늦었지만 숨기지 않고 말할게......

 

 

어쩌면 이걸 말해주러 그들이 돌아왔을지 모르겠다.

우리가 위로받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을 살고 있다는 게 때로는 슬프다. 지금처럼 우리가 위로니 위안이니 소통이니를 외치며 산 적이 있을까. 위로니 위안 따위가 아닌 젊은이들이 희망을 향해 질주하는 세상을 열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