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숲에서 잠자는 여자

권영상 2014. 7. 1. 17:41

 

숲에서 잠자는 여자

권영상

 

 

 

 

오늘 오후다. 안성에서 올라오는 대로 신발을 바꾸어 신고 우면산을 향했다. 우면산 생각이 솔직히 간절했다. 내가 잠깐 잠깐 머무는 안성은 이렇다 할 산이 없는 들판이다. 대부분이 농사를 짓는 논이거나 밭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 숲이 있는 산이 그리웠다. 숲이 감싸주는 초록의 위안과 차분한 회복력.

 

 

 

남부순환로 곁에 있는 샘물터를 지나 한 백여 미터, 층층나무 숲을 지날 때다. 누군가 은빛 돗자리를 깔고, 또 한장을 머리 끝까지 덮고 자고 있다. 돗자리 바깥으로 나온 발이 여자다. 돗자리 옆에는 음식이 들어 있음직한 봉지들과 손가방에 놓여있다. 며칠 전, 아침 시간대에 본 그 여자인 듯 했다. 산을 한 바퀴 돌고 다시 내려올 때다. 그녀가 깨어났다. 치렁치렁 어깨를 덮는 퍼머넌트 머리의 여자가 은박지 돗자리에 앉아 화장을 하고 있다.

이 층층나무 숲에서 돗자리 하나로 노숙을 하는 모양이었다. 인적이 드문 산속으로 들어가고 싶었겠지만 무서웠을 테다. 이쯤이면 샘물터에서 그리 멀지 않고, 산에 켜놓은 보안등도 가깝다. 지난해엔 산 속 참호에 오랫동안을 머물다 간 여인이 또 있었다.

 

 

 

내가 아는 여자도 가족을 두고 집을 나간 적이 있다. 구제금융 시절 잘 나가던 사업이 실패했다. 그도 사업에 실패한 남자들이 집을 나가듯 집을 나갔다. 그는 남편 있는 집의 가장이었다. 조그마한 회사에 다니는 월급쟁이 남편보다 그는 화통했다. 사업체에 걸맞은 사무실에, 승용차에, 그 사업체에 걸맞은 사회활동도 했다. 기부도 할 줄 알고, 언변도 좋았다. 그러는 만큼 집에서도 남편에 대면 자식들에게 화끈하고 멋진 엄마였다.

“용돈 벌러 다니는 거지뭐.”

누가 물으면 그녀는 남편의 직장 생활을 그렇게 말했다.

 

 

 

우리는 가끔 그의 사무실 옥상에서 술을 마시곤 했다. 그럴 때도 그의 남편은 보이지 않는 존재처럼 숨소리를 죽이며 뒷일을 했다. 그러나 그는 멋진 이태리 가곡을 부르며 사람들의 시선을 독점했다. 다들 그를 부러워했다.

그러던 그도 사업의 몰락과 함께 거의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됐다. 그러면서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물론 그의 집에서도 그가 떠나간 행방을 알지 못했다. 당당하기만 하던 그는 가장의 역할이 무너지자,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지고 속죄하듯 집을 나갔다. 그렇게 집을 나간 그가 아이들이 대학에 들어갈 무렵에야 돌아왔다.

 

 

 

여성들의 사회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사회적 지위도 높아지고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가정에서의 비중도 만만치 않게 커지고 있다. 대체로 가장의 역할도 남편에서 아내 쪽으로 옮아가고 있는 것 또한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그 점에서 나는 층층나무 밑에서 노숙을 하고 있는 여자를 다시 생각한다. 여성이 집을 나온다는 것이, 어쩌면 가장인 남성이 실직이나 사업실패의 책임감으로 집을 나오는 것과 유사성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점이다.

 

 

 

은박지 돗자리에 앉아 화장을 하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내가 아는 친구를 닮았다. 비록 산속에서 노숙을 할망정 우아하고 당당해 보이기까지 하다. 그도 괜찮은 직장에서 실직했거나 잘 나가는 사업체를 운영하던 여성일지 모르겠다. 여성이 집을 나오는 사회를 생각해 본다. 끔찍하다. 아무리 경제가 힘들고, 가정에서의 여성의 역할이 막중해졌다 해도 여성이 집을 나오는 사회를 만들어선 안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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