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날밤
권영상
이번도 일 주일만에 안성에 내려왔습니다. 모임도 모임이지만 서울에 가족이 있으니까요. 가족, 이라 하니까 그렇습니다. 자식을 낳아 30여 년을 살았다 해도 정작 나는 가족보다는 가족 바깥의 일에 정신을 팔고 살았습니다. 직장은 어쩔 수 없었다 하더라도 밥벌이도 안 되는 글이나 씁네 하고 그 일에 매달려 살았습니다. 만약에 이런 집중력을 가정에 쏟아부었더라면 어떠했을까요. 지금보다는 몇 배 더 행복했겠지요.
“여기가 당신과 가족이 사는 집이라는 걸 잊지 말어요.”
아내는 늘 이 말로 나를 타일렀습니다. 내가 종종 길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관심있는 일에 정신을 팔다가도 곧장 돌아와야 하는데 그 관성이 부족합니다. 어쨌거나 서울이야말로 아내가 있고 딸아이가 있는 우리 인생의 베이스캠프지요. 그러니 작은 일이라 해도 그 일을 위해서는 하루라도 집에 더 머물러야지요.
일 주일은 가급적 채우고 내려오는 편입니다. 그쯤 지나면 안성이 그립습니다. 얼른 내려가야겠다는 마음이 들면 마구 설레어집니다. 정인을 만나러 가듯 부랴부랴 서둘러 내려옵니다.
어제는 오는 대로 마늘을 캤습니다. 다 캐어놓고 보니 많습니다. 한 접은 넘었습니다. 그걸 캐어놓고 내가 장하다는 걸 처음으로 느꼈습니다. 아버지가 내 손을 타고 오셔서 지어주신 마늘 농사였습니다. 그걸 정리하고 모판에 심어놓은 콩모종을 밭에다 냈습니다.
참 일을 많이 했지요. 땀을 폭 쏟았습니다.
그러느라 힘들었을 텐데도 밤 11시 무렵에야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쉽게 잠 들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안성에 내려온 첫날밤이라 그런 모양입니다. 옆자리에 아름다운 정인을 놓아두고 쉬이 잠들지 못하는 것처럼 자꾸 긴장이 됩니다. 끝내 불을 다시 켜고 일어나 책을 읽어봤습니다. 책도 읽히지 않습니다. 미술잡지들을 들추어 봤습니다.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누운 채 운동을 했습니다. 낮에 너무 육신을 많이 움직여 그런지 오히려 몸만 더 욱신거립니다.
할 수 없이 마당에 나갔습니다. 요만한 집 안에서 자연물처럼 잠들고 깨는 일을 자연처럼 하지 못하고 쩔쩔매다니요. 이 거대한 밤의 궁륭에 비한다면 지금 내가 머무는 곳은 한 점에 불과합니다. 그 한 점 안에서 온갖 잡념이 일어나고 그 때문에 고충을 겪는다는 일이 우습기만 합니다.
허리를 펴고 하늘을 봅니다.
흐렸는지 별은 없고, 먼데서 움직여 오는 비행물체의 불빛만 깜박입니다. 가만히 생각하려니 나의 첫날밤도 이랬습니다. 맑은 날이 아니었습니다. 흐린 밤이었습니다. 우리들의 인생이 고달플거라는 걸 암시해 주듯 신혼여행을 떠난 설악의 밤은 흐려 있었습니다. 춥고 첫날밤이라는 이유 때문인지 불안했습니다.
모든 게 낯설고 불안했던 밤이었지요.
늘 내려오는 안성이지만 올 때마다 느끼는 안성의 첫날밤도 그랬습니다. 경험에 의하면 첫날밤엔 잠이 잘 오지 않았습니다. 건너편 산의 소쩍새 울음도, 가끔씩 비명을 지르듯 우는 새 소리도, 이웃집 농가의 개 짖는 소리도 편안하게 들리지 않았습니다. 이층 계단이 쿵, 하고 내는 소리, 지붕에서 쩡, 하고 들리는 소리, 아무도 없는 마당에서 저벅저벅하는 소리도 머리를 쭈볏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첫날밤은 집도 나도 서로 껴안지 못합니다. 아무리 부부라 해도 첫날밤은 서로 긴장하며 밤을 보냅니다. 서로의 거리를 좁힐 마음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거리를 좁히는 데 적어도 하루쯤은 필요한 듯 싶습니다.
그러고 나면 이틀째, 나는 안성의 이 집에 안겨듭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집도 나를 덥썩 안아줍니다. 그제야 우리는 오래 쌓아온 정분을 재빨리 회복합니다. 그리고는 편안한 마음으로 이 집의 품에 안겨 잠을 잡니다. 듣기에 안 좋던 밤새소리며 이웃집 개 짖는 소리도 푸근히 귀에 들려옵니다. 나는 이 집이 주는 고요와 안락과 정적을 마음껏 누리며 잠에 취합니다.
집은 마치 두어 살 많은 손위의 여인처럼 나를 지긋이 감싸줍니다. 그 동안에 겪었을 고충과 불안을 달래어주고, 인생의 무게를 들어내어 어린아이처럼 그 품에서 놀게 합니다. 나이먹은 여인의 몸은 만족과 함께 안락에 빠지게 하는 매력이 있지요. 그래서 이틀 밤이 지나면 집에 정이 들기 시작합니다. 집은, 여인과 같은 집은 이때부터 사내를 사로잡습니다. 멀지 않아 사내가 자신의 품에서 떠나갈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인의 몸에 빠져 길을 잃은 사람을 보았습니다. 혼자 거처하는 집의 매력에 빠져 가족이 있는 베이스캠프를 아예 잊은 채 사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가족을 버리고 혼자 전원에 묻혀사는 이들은, 어찌보면 집이 뿜어내는 매력에 그만 도취하였기 때문이겠지요. 하루 종일 말 한 마디 없이 살아도 도무지 불편하지 않는 건 무엇 때문일까요. 집이 편안한 여인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편안해도 나는 설레는 첫날밤이 좋습니다. 서로 낯설어 긴장되고, 흥분되고, 약간은 불안한 밤이 좋습니다. 편안해지면 나태해지기 시작합니다. 처음, 집을 찾아 내려올 때의 흥분이 없어집니다. 서로의 거리를 좁혀가려고 잠을 못 이루며 긴장하는, 첫날밤의 여자가 좋듯, 그런 집의 하룻밤이 좋습니다. 그래서 나는 대체로 정인을 만나듯 설레는 마음으로 와 사흘밤을 자면 서울로 올라갑니다. 편안한 여인의 육체에 빠져버릴까봐 그렇습니다. 오래 입어 보풀이 이는 편한 옷보다 아직 몸에 맞지 않아 까칠하기만한 새옷의 촉감이 나는 언제나 좋습니다. 그래서 사랑이 내 몸에 깃들 때 그 사랑을 안고 훌쩍 떠나갑니다. 좀 피곤하지만 첫날밤 같은 긴장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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