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상처

권영상 2014. 7. 18. 17:54

상처

권영상

 

 

 

 

“당신 남방 하나 샀어.”

늦게 퇴근한 아내가 저녁 식사를 마치더니 백화점 쇼핑백을 내놓았다.

“딱 맞네 뭐!”

쇼핑 백을 열어보면서 나는 소리쳤다.

“입어 보지도 않고?”

아내가 다행이다 싶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입어보나 마나였다. 내가 좋아하는 그 색상이었다. 붉은 색이 도는 적갈색 바탕에 흰색 줄무늬. 체격이 크고 팔이 긴 내 몸을 재어다 만들기나 한 것처럼 정말 딱 맞았다.

“당신 옷 다시는 안 산댔는데, 천만 다행이네.”

나보다 아내가 더 반겼다.

 

 

 

 

아내가 내 옷 사오는 일에 대해선 나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 색상이 맞으면 크기가 작거나 너무 크거나 하고, 크기가 맞으면 색상이나 디자인이 마음에 안 들었다. 마누라 옷 사주면 그것만으로도 고마운 거니 군소리 말고 입으라는 친구들 말도 있다. 그렇긴 하지만 나는 좀 다르다. 우리나라 표준치보다 내 몸이 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할 수 없이 입고 살아온 게 수십 년이다.

그런데 이번엔 뜻밖에도 한눈에 딱 맞는 옷이다.

“이젠 옷 만드는 사람들도 내 마음을 좀 알아주는 모양이지?”

나는 거울 앞을 비켜나며 기분 좋게 옷을 벗어 의자에 걸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한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오른쪽 주머니 위쪽에 웬 틈이 슬쩍 보였다. 예리한 칼자국 같았다. 새끼손가락을 밀어 넣자, 쑥 들어갔다.

 

 

 

 

“에이, 꼭 이런다니까!”

난데없는 내 불만에 아내가 달려왔다.

구멍 난 자리를 보더니 아내가 쩝, 입을 다시며 쇼핑백에 구겨 넣었다.

체격이 큰 내겐 이런 경우가 없지 않아 더러 있었다. 오랜만에, 어쩌다 하늘이 주신 듯 한 큰 규격의 옷이나 신발을 구하면 꼭 무슨 흠이 하나씩 있었다. 딱 맞는 스웨터를 사가지고 집에 와 다시 입어보면 팔 길이가 다르거나, 온 거리를 다 뒤져 간신히 큰 사이즈의 신발을 구했는데 돌아와 보면 신발 밑창에 금이 가 있다거나.......

“딱 맞다 길래 이상하다 했지.”

결국 아내는 남방셔츠를 바꾸어오겠다며 일어섰다.

 

 

 

 

그 며칠 뒤, 백화점이라며 아내한테서 전화가 왔다.

“어쩌지! 당신 그 옷 그렇게 좋아했는데 그 옷 단종 됐다네.”

그 말에 나는 좀 허탈했다. 내 손에 다 들어온 선물을 놓쳤을 때의 기분이 그럴까.

“다른 옷으로 바꾸어갈게.”

그러고는 아내가 전화를 끊었다.

자꾸 아쉽게 느껴졌다. 망설이던 나는 서둘러 아내에게 다시 전화를 했다. 내 전화에 아내가 되물었다.

“그래도 입겠다고? 왜 멀쩡한 사람이 상처 난 옷을 입어?”

“그래도 입을래.”

나는 내게 딱 맞던 그 옷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나처럼 표준 규격의 혜택, 그러니까 기성복 세례를 받아보지 못한 사람의 심정을 모르는 사람은 모른다. 나는 1990년대 외국 브랜드 옷들이 수입되기 전까지만 해도 재킷도, 빌려 입은 것처럼 달랑한 재킷을 입었고, 바지도 맞는 길이가 없어 바짓단을 뜯어 내리거나 천을 덧대어 입었다. 지금도 장갑은 맞는 게 없어 맨손으로 겨울을 난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나도 기성품으로부터 완전히 소외당한 상처받은 사람이다. 남들은 옷가게에 들어가 제 몸에 맞는 옷을 사 입고 나오는데 나는 그냥 돌아 나오거나 어쩌다 엑스라지의 볼품없는 색상의 옷이라도 만나면 감지덕지 사들고 나왔다. 그러니 비록 상처난 옷일지라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결국 아내는 적갈색 남방을 그냥 들고 돌아왔다.

구멍 난 자리를 다시 봤다. 며칠 전에 처음으로 보던 그때보다는 작게 보였다. 아내의 말처럼 이 흠결이 이 옷이 안고 있는 상처였다.

나는 바늘을 찾아들었다. 비슷한 색깔의 실로 상처를 아물리듯 조심조심 꿰매었다. 그렇게 애써봤지만 거울 앞에 서면 금방 기운 자리가 눈에 띄었다.

그래도 나는 그 남방을 입고 강의를 들으러 다니고, 글 쓰는 동료들을 만나고, 동시집 출판 컨셉을 위해 여러 차례 출판사 젊은 편집자들을 만났다. 처음엔 그들 모두 내 옷의 꿰맨 자리를 보는 것 같아 앉아도 나는 옆으로만 앉았다. 그러나 짓궂은 이들은 내 옷의 꿰맨 자리를 알아보고 거침없이 바느질 솜씨가 좋다느니 하며 한 마디씩 했다.

 

 

 

 

“옷 좀 이리 줘봐.”

어느 날, 급기야 아내가 내가 즐겨 입고 다니는 적갈색 남방을 찾았다. 아내 손에 풀꽃 모양을 한 작은 천조각이 들려있었다. 아내는 내가 꿰맨 자리에 그 풀꽃 조각을 올려놓고 감침질을 해선 내게 건넸다.

옷을 입고 거울 앞에 섰다. 처음엔 낯설고 눈에 자꾸 띄었지만 자꾸 볼수록 재미있고, 또 개성있게 보였다. 그러고 보니 옷의 상처가 아물어 그 위에 노란 들꽃이 피어난 격이다. 자연스럽다 못해 이 옷이 만들어질 때부터 그렇게 나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옷 바꾸지 않고 그냥 입기 백 번 잘 했네.”

아내가 손바닥으로 내 가슴을 탁탁 쳤다. 상처 난 자리 위의 꽃이 반듯해졌다.

 

 

 

내게는 옷에 대한 아픈 상처가 있다. 그런 내가 상처를 가진 이 남방을 보란듯이 즐겨 입는다늦은 봄에 산 이 긴 소매 적갈색 남방은 한여름인 지금에도 햇볕에 팔이 탄다며 나는 줄창 입는다. 어쩌면 팔이 타는 걸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옷이 상처를 가진 옷이기 때문에 더욱 가까이 하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