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낙서 천태만상

권영상 2014. 9. 5. 09:17

낙서 천태만상

권영상

 

 

 

“친구 집에 놀러갔는데 친구는 없고 친구 누나만 누워 자고 있었다. 나는 친구 누나의 잠자는 모습을 보다가 슬그머니 앉아.......”

 

어디서 많이 본 적 있는 이 글은 대표적인 화장실 낙서다. 학교 변소나 공중변소의 문짝에 주로 많이 써져 있던 7,80년대를 풍미하던 낙서 중에서도 가장 그럴싸한 낙서다. 문장형 낙서다. 폐쇄된 화장실에서 쓴 낙서라 글씨가 그런대로 정돈되어 있고 장문이라는 특징이 있다.

일반적으로 낙서는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하는 은밀한 행위로 또한 그곳이 남의 눈에 잘 띄는 곳이라야 한다는 모순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남의 시선을 피하려면 재빨리 휘갈겨 써야 한다. 그러므로 예술성 같은 건 고려할 수 없다. 다중의 시선과 만나는 곳이라면 동네 골목길 담벼락이거나 전신주, 특정인의 집 대문 또는 공공장소 등의 허가받지 않은 공간이다.

 

 

 

낙서는 요즘에도 있다. 몇 년 전, 장기결석을 하는 우리 반 아이를 찾으러 다니다가 학교주변 길에서 발견한 낙서들이 있다. ‘주효 짜증나.’ ‘이성남 ♡ 전예희’, ‘처음 느꼈던 그 설레임’, ‘류진석 바보’, ‘메롱’, ‘ 너를 사랑해’, ‘씨발’, ‘섹스’....... 금기시하던 ‘SEX’라는 단어가 낙서 속으로 종종 뛰어 들어왔다.

‘2+100=102’, ‘1000+5=1005’ 그리고 그 밑에 ‘내가 했어요’ 라는 낙서도 본 기억이 있다. 주로 담벼락과 담벼락에 붙은 광고지의 빈자리가 낙서의 표적이었다.

 

 

 

낙서는 아이들만 하는가? 그렇지 않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본 관악산 바위에 쓴 낙서는 어른이 쓴 경우이다. 산꼭대기 커다란 바위에 멀리서도 한 눈에 보이도록 쓴 낙서다. ‘진리만을 가르치니 깨우쳐 성현이 되는 것이 믿음이요......’ 글씨의 크기도 크기려니와 내용으로 보아도 어른의 낙서가 분명하다. 이 낙서의 용구는 에어로졸 스프레이다. 낙서에 나타나는 시대성이다. 

 

 

 

예전에도 낙서는 있었다.

너무나 우연한 데서 재미난 낙서를 발견했다.

강릉 집에 일이 있어 볼일을 보고 우연히 경포대를 찾았다. 호수 곁의 홍장암을 지나고, 참소리 박물관을 지나 경포대에 올랐다. 

‘본적 함남 이원’ 이런 낙서가 기둥 아래 난간에 있었다. 묻어버린 역사처럼 고동색 페인트 속에 숨겨진 채 어렴풋한 음영만 드러나 있다. 지금은 북한 땅인 본적이 함남이라는 낙서에 호기심이 갔다. 그 곁에 ‘八七 十 二十八 권정웅’이 있다. ‘87’년은 단기력이다. 서력으로 바꾸면 1954년이다. 그 곁에 ’尹在福‘이 있고, 그 곁에 ‘金山中 崔成官’, ‘KYJ'라는 이니시얼이 있다. 모두 칼로 새긴 낙서들이다.

 

 

 

이 무렵의 낙서는 주로 칼로 새겼으며, 한자 문화 시대였음을 알 수 있다. ‘金山中’이라는 말이 궁금했는데 다른 곳에서 발견한 낙서를 보고 그 정체를 알게 됐다. ‘大田高 金鎔石’ , '玉中 PNY', ‘首都女高 李燦玉 四二八七 八 二十一’ 으로 보아 금산중, 옥중, 대전고, 수도여고는 모두 학교 이름이다. 이 무렵 전국의 중고등학교들이 경포대에 ‘수학여행’을 왔다는 뜻이다. 주로 8월이나 10월이 학교 여행 시즌인 듯하다. 낙서를 하는 이들이 학생이라 자신의 이름을 영어 이니시얼로 새기기도 했다.

 

 

흥미로운 것은 단체 여행 중에 언제 칼로 나무 난간에 이걸 새겼을까 그게 궁금했다. 관광지이니까 관광객들로 붐볐을 텐데, 그들 눈을 어떻게 피했을까. 어떻든 부랴부랴 제 이름을 새기느라 다급해하던 이들의 표정이 떠오른다. 수도여고 학생의 낙서로 보아 낙서에 남녀 구분이 없음도 알 수 있다.

 

 

 

 

재빨리 새겨야 하기에 글씨가 단정하기보다 빗나간 칼자국으로 거칠다.

낙서란 대개 사적 욕구 분출이거나 타인이나 사회를 향한 발언이라 자신의 이름을 숨기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이 무렵의 낙서는 자신의 이름을 당당히 학교 이름과 함께 밝히고 있다. 당시 사람들의 자기 과시의 특성을 엿 볼 수 있다. 이는 조선조 조상들의 명승지 바위에 이름을 남기던 영향을 닮았다.

명승지 바위에 자신의 시와 이름을 명필가의 글씨를 받아한 낙서를 일종의 대중미술이나 민간미술 차원이라 본다면 이들의 허겁지겁 새긴 낙서는 이름을 남기겠다는 그저 순박한 행위로 밖에 볼 수 없겠다.

 

 

 

사랑을 표현한 요즘의 낙서가 ‘이성남 ♡ 전예희’ 이라면 그 당시엔 ‘金福起 안해 김영춘’ 이런 식이다. ‘기ㅁ해겨ㅇ’ 한글 풀어쓰기 낙서도 있다. 그 시절 학생들의 글씨 경향이 엿보인다. 그 곁엔 이런 낙서도 있다. ‘교사 장보후’, 그러고 보면 그 시절엔 인솔교사도 버젓이 제 직업을 걸고 낙서를 했던 모양이다.

정자를 한 바퀴 돌면서 들여다본 난간엔 수없이 많은 이름들이 새겨져 있었다. 그 말은 곧 자신의 족적을 영구히 남기겠다는 그 당시 사람들의 소박한 과시문화의 표출이 되겠다. 

 

 

“낙서한 놈 나쁜 놈!”

읽을수록 재미난 낙서다.

“낙서는 무나인의 수치”

이런 낙서도 한 때 유행하던 문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