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향기는 바람이 불어야 멀리 간다
권영상
어느 아침, 동네산에 올랐다. 전날부터 내린 비 탓인지 을씨년스럽다. 묵직한 하늘에선 찬 바람마저 쏟아진다. 목에 두른 손수건을 바투 잡아맸다. 바람이 차고 을씨년스러워도 날은 어제 오늘 다르다. 웬걸, 중턱에 오르니 생강나무 꽃이 벌써 노랗다. 나는 순간, 이 산속 깊숙한 골짜기에 숨어있는 생강나무 군락을 떠올렸다. 내 머릿속 봄은 늘 거기 생강나무숲에서 달콤하게 왔다.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루할 만큼 춥고, 수북수북 쌓인 지난 겨울의 눈과 마주할 때면 나는 그 생강나무 골짜기를 떠올렸다. ‘봄은 거기 있을 테지’하고.
소망탑에서 북쪽 산비탈을 타고 내리면 그늘이 깊은 골짜기가 나온다. 그 골짜기에 이르자, 머리칼을 흔드는 바람결에 생강나무 꽃향이 얹혀와 내 코를 자극한다. 나는 흡흡흡 코를 벌름거리며 한 걸음 한 걸음 내려섰다. 예감대로 골짝이 온통 생강나무꽃으로 노랗게 물들었다. 수십 그루다. 나는 그 중 꽃 많은 나무 아래에 무질러 앉았다. 앉고 보니 그만큼 낮은 자리라고 바람이 없다. 고요히 눈을 감았다. 생강나무 꽃향이 내 몸안으로 깊숙히 스며든다. 산 기운은 춥고 서늘하지만 밀려드는 향기는 달콤하다.
잠시 동안 앉아 있는 내 몸이 머무는 걸 못 참고 자꾸 일어서자 한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나는 내 몸을 달래어 주저앉혔다. 집에 두고 온 일은 또 집에 두고 온 일이다. 봄이라고 늘 생강나무 꽃피는 봄이 아니지 않은가. 일어서려는 몸을 누르고 나니, 내 몸이 산속 시간에 길들여지는 모양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꽃나무들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꽃이 필 때만은 바람이 좀 불지 않았으면......’
그 말을 하고 보니 내 생각이 틀렸다. 꽃 피는 일을 바람이 훼방 놓기를 바라는 이는 없다. 그러나 바람이 불지 않으면 어떻게 꽃향기가 멀리 갈 수 있을까.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나는 옷을 털고 일어섰다. 봄은 이 컴컴할 만큼 으슥한 골짝에 숨어 이처럼 고운 꽃을, 그것도 봄날의 맨 처음에서 핀다.
산비탈을 걸어 내려올 때다. 모퉁이 하나를 지나자, 슬쩍 불어오는 바람에 생강나무 꽃냄새가 또 물씬 난다. 바람이 불 때마다 건듯 날아와 코를 스치는 꽃향기. 발을 멈추어 사방을 둘러보면 저쯤 잘 안 보이는 골짝 그늘에 꽃을 물고 선 생강나무가 있다. 그들은 그렇게 이 산 속, 눈에 잘 띄지 않는 자리에 서서 향기를 뿜는다. 멀리 있어도 산이 아름다운 건 그런 은자와 같은 꽃나무들이 산 어딘가에 숨어있기 때문이다.
산에서 내려와 남부순환로를 건넜다. 데이터 빌딩 앞을 지나던 나는 그만 가던 걸음을 딱 멈추고 말았다. 바보도 이런 바보가 있을까. 그 빌딩 곁을 지나 산을 올랐으면서도 나는 그 빌딩 앞에 이토록 화사하게 핀 목련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이 찬 바람이 꽃 피는 일을 시기하였을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지고 있다. 꽃잎이 지면 다들 아프다. 우리 인생의 꽃잎도 바람에 흔들려 질 때면 아프다. 아픔이 있다 해도 바람이 불어야 꽃은 지고 열매를 맺는다. 마치 시련을 잘 겪어낸 인물의 향기가 우리 사는 세상을 아름답게 하듯이. 우리가 이런 봄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건 또 얼마나 큰 위안이며 축복인가
(교차로신문 2013년 3월 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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