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님, 행복하세요
권영상
퇴근 무렵, 볼일을 보고 돌아올 때다. 골목을 막 꺾어 도는 데 눈앞에 달이 떠올랐다. 집 방향으로 가는 정면, 상가와 아파트들 사이로 숨어 있던 보름달이 둥두렷 드러났다. 갑자기 대면하는 달이라 그런지 크고 더 없이 붉다. 그러고 보니 오늘에 보름달이 뜬댔다. 커다란 얼굴을 가진 외계의 한 신비한 존재가 나를 굽어보는 것 같다. 어쩌면 문 밖에 나와 늦은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나를 맞아주는 아버지의 친근함을 닮았다.
나는 길가에 잠시 섰다.
“아버지!”
속으로 아버지를 불렀다. “오냐!”하는 아버지의 대답이 보름달 속에서 들리는 듯 하다. 그만큼 달은 아주 가까웠다. 마치 이층 옥상쯤에 서서 내 목소리를 다 들으시는 듯 했다. 나는 그런 보름달을 향해 다시 속삭였다. “애도 에미도 다들 건강하게 해 주세요.” 그러면서 발을 떼어놓았다. 이승을 뜨신 아버지가 잘 계시는지, 잠자리는 불편하지 않으신지, 뭐 그런 건 안 묻고 내 청부터 드렸다. 내가 집에 다 들어갈 때까지 떠나지 않고 나를 굽어보는 달은 부모님과 다를 바 없이 은근하다. 무슨 요구든 다 들어주실 것만 같다.
어제 정월 보름에 동네 걷기길에 나갔다. 저녁이 아니고 점심을 먹고난 뒤 간단히 운동을 할 겸 나갔다. 고속도로 곁이어서 길의 높이가 높다. 거기 올라서고 보니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밤이라면 열하루 열이틀 달도 충분히 볼만한 자리다. 한참을 걷는데 길가에 서 있는 소나무에 무언가가 팔랑댄다. 누군가 코팅을 해서 매달아놓은 사랑표시 모양의 작은 종이이다. 거기에 글씨가 적혀있었다.
“인수지 소원 이루길.”
바람에 흔들리는 그 종이 뒷면에도 글씨가 있다. “준형이 취업해라.” 그런 글귀다. 다시 보니 동녘을 향한 나뭇가지다. 동쪽을 향한 나뭇가지에 소원을 적어 붙이면 그 뜻이 이루어진다는 말을 들은 것 같다. 나는 그걸 올려다 보며 인수지와 준형이의 소원이 꼭 이루어지길 바랐다. 그들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와 함께 머물러 사는 이 도시의 사람으로서, 그들보다 더 나이 많은 연장자로서 그런 기원은 즐거운 일이다.
언젠가 우면산 길축제에 붙여놓은 소원쪽지를 읽어본 적이 있다. 제일 많은 소원이 가족의 건강이다. 그리고 학업성취, 결혼, 취업, 진급, 이성교제, 면접 등이다. ‘우리 아빠 돈 많이 벌게 해주세요’ 라거나 ‘휴대폰 꼭 갖게 해주세요’그런 소원도 있었다.
내게도 내가 지극하게 원하는 소원이 있다. 소박함에 대한 그리움이다. 남들보다 좀 적게 가지면서도 남들만큼 행복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기원. 세상을 살며 늘 나를 반성해보는 일이 그 일이다.
승용차가 아니라 걸어 움직이고, 값비싼 옷이 아니라 기운 옷을 정갈히 입는, 배불리 먹는 일이 아니라 좀 적게 먹는, 그러면서 소박한 일을 즐길 줄 아는 삶.
나는 집앞에 다 와 빌딩 뒤로 사라지는 보름달에게 빌었다.
“달님, 이 기원만은 꼭 들어주세요. 부디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나보다 우리 사는 세상이 좀 깨끗했으면 좋겠다.
(교차로신문 2013년 3월 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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