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은 개인주의를 지향한다
권영상
가정에 한 대씩 있던 전화기마저 사라진 집이 많다. 전화기가 사라진 가장 큰 이유는 휴대폰이다. 저마다 휴대폰을 쓰니까 전화기를 둔다는 건 비경제적이기도 하다. 그래서 집안의 중심에 있던 전화기가 없어지고 있다. 이제 가족들은 각자 자신의 방에서 문을 닫고 어디론가 외부로 전화를 하고, 문자를 끊임없이 날린다. 한 가족이어도 제각각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쉬지 않고 통신을 한다. 몸은 분명 한 지붕 아래 있지만 가족 구성원들의 생각의 방향은 가족이 아니라 늘 외부를 향하고 있다.
울산에 볼일이 있어 엊그제 다녀왔다. 거기 문학하시는 선배 한 분이 자신의 집 이야기를 하셨다. 얼마전에 시집 간 딸이 제 남편과 아이 둘을 데리고 집에 왔단다. 와서는 오순도순 사는 이야기를 하는게 아니라 오자마자 제 각각 휴대폰을 들고 뿔뿔히 흩어져 문자를 하고 게임을 하더란다.
밥 먹을 때에도 식탁에 휴대폰을 얹어놓고 문자를 날리고, 휴대폰 속의 누군가와 키득거리고, 중얼거리고, 거기서 꺼낸 노래를 듣고.....하더란다.
웃자고 좀 과장해서 하신 말씀 같았다. 그렇지만 그 자리에 앉은 이들 모두 그 말에 공감했다. 좀 덜 심각할 뿐이지 그런 경험담 한 마디씩은 다 했다. 어쩌면 가족공동체가 휴대폰이라는 이기 때문에 허물어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마다 엄청난 통화료를 내며 휴대폰을 쓰지만 가족은 구성원들의 고민이 무언지, 그들의 아픔이 뭔지 정작 알지 못한다. 가족 구성원들은 가족과 대화하는 게 아니라 점점 휴대폰과 대화한다. 밀폐된 자신의 방에서 또는 가족과 멀리 떨어진 외부에서 휴대폰과 통화하며 산다.
가정 전화기가 공동체를 지향한다면 휴대폰은 개인주의를 지향한다.
전화기는, 벨이 울리면 누구든 전화를 받아 발신자가 원하는 이에게 수화기를 건네주는 예법이 있다. 그런데 휴대폰은 그렇지 않다. 아무리 소리쳐도 주인이 아닌 이가 받는 건 예의가 아니게 되어버렸다. 아내의 휴대폰이 운다고 남편이 대신 받는 건 대단한 결례다. 그러니까 내 고민이 뭐라고, 내가 지금 죽고 싶다고 아무리 비명을 질러도 휴대폰의 예법처럼 그 누구도 그 비명을 들어줄 수 없는 가족이 되어버렸다. 휴대폰의 개인주의가 공동체 구성원간의 간고한 벽을 쌓아올린 셈이다.
집 전화기의 벨이 울린다. 시금치를 데치던 아내가 턱으로 전화기를 가리킨다.
“저, 분남이에요.”
전화를 받자, 전화기 속 목소리가 반갑게 응대한다. 분남씨가 누구인가. 아내의 초등학교 동창이다. 바쁜 손이 난 틈을 보아 아내에게 수화기를 건넨다. 통화를 마치자, 아내가 얼른 가스레인지 쪽으로 다시 간다.
“뭐래?”
내가 묻는다.
“아들 제대하면 바로 결혼시킨대.”
그쯤 서로 묻고 살게 해주는 게 바로 집 전화기다.
(교차로신문 2013년 2월 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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