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숙씨, 중학교 졸업하다
권영상
"뭐 좋은 문구 없을까? 내 친구 봉숙이 오늘 중학교 졸업이야.”
아내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봉숙씨가 중학교에 다닌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그래도 놀라웠다. 아내는 선물할 책에다 뭔가 좋은 축하의 글을 써주고 싶은 모양이다. 펜을 들고 내 도움을 청한다. 봉숙씨는 아내의 시골 초등학교 동창생이다. 초등학교 친구 중엔 서울에 올라와 사는 이가 십여 명이나 된다. 그중에서도 봉숙씨는 결혼을 잘 하여 가정도 잘 꾸렸다. 남편도 훌륭한 분이고, 아들딸도 반듯하게 잘 키웠다.
“글쎄. 뭐 형설의 공, 이런 말이 좀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고리타분하긴 해도 봉숙씨의 졸업엔 그런 말이 어울릴 것 같았다. 쉰 중반의 나이에 중학교를 졸업하자면 시련이 없지 않았을 테다. 지금은 남편도 잘 알려진 대기업의 이사로 누구 부럽지 않게 살고 있다. 그래도 그 나이에 학업을 할 때에는 그런, 반딧불이의 힘을 빌릴 만큼의 그 누군가의 공이 있었을 것 같았다. 그게 가족이건 본인 자신이건 간에.
"형설의 공을 받들어 졸업하는 내 친구"
아내가 펜으로 그렇게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그 밑에 작은 글씨로 "계속 공부하여 대학도 나오고 대학원도 나오길!" 이라고 썼다.
“봉숙이가 책 읽기를 좋아해서 책을 선물하는 거야.”
아내가 펜을 놓으며 책을 덮었다. 호세이니의 ‘연을 쫓는 아이들’이다.
나이 쉰 중반의 친구에게 소설을 한 권 선물하는 아내와 그 봉숙씨 사이가 순수하고 멋져 보였다. 중학 공부를 못한 이들의, 공부에 대한 목마름을 우리가 제대로 알 리 없다. 그까짓 중학교 공부 없이도 그들은 험난한 인생을 누구보다 잘 견뎌왔다. 그리고 누구 부럽지 않게 잘 살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이 중학 공부를 이 나이에 시작하는 건 어쩌면 과거 어느 한 시기의 결핍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느 날, 텔레비전 '방송대학' 채널을 켰을 때다. 머리칼이 희끗희끗한 60대의 사내가 책을 가득 넣은 여행용 가방을 끌고 방송통신대학 교정으로 들어서는 장면이 나왔다. 그는 그 대학 학생이었다. 이 나이에 왜 학교를 다니느냐고 기자가 물었다.
“어린 시절입니다. 넉넉지 못한 집안 형편에 형이 공부를 해야했기에 저는 중학교도?절반만?다니다 결국 그만 두었지요.”
그는 거기에서 눈시울이 붉어지도록 눈물을 흘렸다.
사람은 누구나 아픈 과거의 결핍을 가지고 현재를 살고, 미래를 살아간다.
봉숙씨의 졸업식에 한번 가보고 싶다.
왠지 그 풍경이 눈물겨우면서도 행복할 것 같다. 늦은 나이에 배우는 그분들의 공부엔 치열한 경쟁이 없었을 테다. 서열을 위한 공부도 없었을 거고, 먹고 사는 수단의 공부도 없었을 거다. 그러기에 요즘 아이들 졸업식과 다르게 무척 아름다울 것 같다. 봉숙씨의 졸업을 축하한다.
(교차로신문 2013년 2월 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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