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빛 상추 한 접시
권영상
펑펑 눈이 내리는 걸 보고 안성에 왔습니다. 안성에 눈이 쌓이면 고립무원인 채로 한 열흘이든 보름이든 있을 생각으로 왔습니다. 라면도 한 상자 사가지고요. 편안함에 길들여진 내게 채찍이라도 한 대 갈겨줄 작정이었습니다.
그렇게 달려왔는데 안성 집에 도착한 두 시쯤 장난처럼 눈이 다 그쳤습니다.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대신 날씨가 은근히 추워집니다. 나는 백암에서 사온 부직포를 상추 온상 곁에다 두었습니다. 이따가 저녁에 덮어주려고요. 가을 한철 간간히 맛 보던 상추를 그냥 얼어죽게 둘 수는 없습니다.
나는 든든히 옷을 입고 논벌로 나갔습니다. 며칠 집을 비운 사이 뭐가 변했나 싶어 운동삼아 안말 쪽을 향했습니다. 안말을 벗어나자, 수로를 따라난 시골 포장된 농로를 걸었습니다.
저쯤 과수원 아카시나무 울타리가 소란스럽습니다. 호콩만한 참새들이 잽잽잽잽 떼어지 웁니다. 모르긴 해도 아카시 씨를 까먹거나 빨간 노박덩굴 열매를 발려먹느라 소란을 피우는겠지요. 내가 울타리 곁을 지나가도 통 인기척을 못 느낍니다. 해 지기 전에 씨앗 하나라도 더 먹어두려는 거겠지요.
까닭없이 그들의 밥상을 치는 게 미안해 그 아래 논두렁길로 내려섰습니다. 포장길 보단 물렁물렁한 논두렁 흙길이 좋습니다. 참새 떼들 덕분이 우연찮게 무른 논둑길을 걷습니다. 물이 고여있는 논과 도랑이 군데군데 얼었습니다. 발끝으로 얼음을 꾹 밟아도 용케 견딥니다. 결국을 깨어지고 말았지만 논벌의 기온이 추운 건 분명합니다.
논두렁길 저 쪽 앞에 아주머니 두 분이 보입니다. 천천히 다가가 보니 도랑물에서 뭔가를 잘라냅니다. 미나리입니다. 얼음 언 도랑물 한가운데에 물미나리가 파랗게 자라올랐습니다.
“아저씨도 몇 개 끊어가세요.”
아주머니 두 분이 차가운 물속에서 끊어낸 미나리를 보여줍니다. 누가 일부러 키운 것은 아닌듯합니다. 나도 도랑둑에 앉았습니다. 허리를 길게 빼어 물속 미나리 서너 뿌리를 뽑았습니다. 냉한 얼음물 속에서 자라 그런지 줄기가 차고시립니다. 나는 미나리를 마른 지푸라기로 묶어들고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에 와 비닐 용기에 흙을 담고 미나리를 심어 창가에 두었습니다. 겨울내내 파란 미나리 새 순을 볼 계획입니다. 냉랭한 얼음물속에서 컸으니 창가에서도 잘 자라겠지요. 좀 멀리 떨어져서 미나리순을 봅니다. 창밖의 조락한 배경과는 달리 파랗고 투명합니다. 그걸 자꾸 보고 있으려니 갑자기 초록 미각이 동합니다.
나는 빈 그릇을 하나 들고 텃밭에 나갔습니다. 혹시나 하고 만들어본 비닐 온상에서 상추가 크고 있습니다. 초짜가 만든 조그마한 온상입니다.
비닐 안벽에 뽀얀 물방울이 가득 매달려 있습니다. 톡톡톡, 노크를 합니다. 노크 소리에 놀라 물방울들이 데구르르 굴러떨어집니다. 허리를 숙여 물방울 지나간 자국으로 안을 들여다 봅니다. 파란 빛이 보입니다. 비닐 한쪽을 조금 들어올리고 손을 들이밀었습니다. 온기가 고여있나 봅니다. 나는 그 파랗고 깨끗한 빛을 붙잡습니다. 손끝에 닿는 빛은 사람의 피부처럼 온기가 있습니다.
허리를 기울여 한 잎 두 잎 파란 빛을 따 빈 그릇에 담습니다. 빛을 따 담으면서 보니 그것은 순간 순간 낯에 익은 식물성 상추잎으로 변합니다.
봄상추에 대면 잎이 작습니다. 앵초잎만합니다. 짙은 초록인 것도, 잎 표면이 도톨도톨한 것도 추운 봄에 자란 앵초잎을 닮았습니다.
빈 그릇에 상추 스무 잎을 따가지고 돌아설 때입니다. 젖은 구름을 밀치고 나온 겨울햇살이 마당 풀섶에 쏟아집니다. 풀섶에 숨은 초록빛 한 점이 얼핏 눈에 들어옵니다. 부추잎입니다. 이게 어쩌다 여기 하얗게 말라버린 잔디 속에 들어와 멀쩡히 살아있을까요. 나는 그것이 아까워 끊으려고 허리를 숙였습니다. 그러다가 얼른 손을 거두워 들였지요. 뭐든 눈에 보이는 족족 입에 넣으려는 풍습이 잔인하게 느껴졌습니다.
도랑물 속에서 크는 미나리 순, 찬 바람 부는 땅에서 보석처럼 반짝이는 부추잎...... 가을이 떠나가면서 초록빛을 징검돌처럼 여기저기 대지 위에 두고 갔나봅니다. 입춘이 지나고 때가 되어 봄이 불 붙을 때, 그때에 불씨로 쓰려고 숨겨둔 모양입니다.
오늘 저녁은 청국장국입니다.
멸치와 다시마 한 조각 우려낸 물에 청국장 한 숟가락을 풀고, 내가 좋아하는 감자 한 알을 잘라넣었습니다. 그걸 좀 익힌 뒤에 손수 키운 배추와 반쯤 여문 생대추 네 개를 깎아넣고 끓였습니다.
반찬은 초록빛 상추 한 접시입니다.
이것만으로도 오늘 식탁은 풍족할 것 같습니다.
상추를 집어 푸른 맛을 봅니다. 대지의 기운이 내 몸안으로 성큼 들어서는 기분입니다.
내가 오랫동안 꿈꾸어 왔던 저녁입니다.
식탁 옆 창가에 놓아둔 미나리가 나를 고즈넉히 굽어봅니다.
미나리의 깜찍한 시선에 내 몸이 별안간 초록으로 변합니다.
혼자 식탁 앞에 앉았지만 혼자가 아닙니다. 한 끼 밥상 위에는 보이지 않는 손이 다 세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청국장은 청국장대로, 상추는 상추대로 그것을 만드는 일에 가담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고립무원을 바랐던 내 생각은 틀렸습니다. 보이지 않는 수 많은 손들과 자연과 이 식탁 앞에 앉아 소리없는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나 혼자란 있을 수 없습니다. 풀 한 포기와 같이 있어도 같이 있는 것입니다.
혼자 지내는 안성의 밤이 춥습니다. 그러나 이 추운 밤에도 바깥에서 떨며 잠자는 미나리며 부추 같은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좀 추워도 참으며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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