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김장은 잘 하셨나요

권영상 2013. 11. 18. 20:30

 

김장은 잘 하셨나요

권영상

 

 

 

 

 

 

김장철입니다. 이달 초부터 언론에선 김장 적기가 26일이라고 합니다.

지난 금요일이었습니다. 기온이 영하로 내려간다는 기상예보가 자꾸 마음 쓰이게 했습니다. 안성에 심어놓은 배추 때문입니다. 26일이면 아직도 열흘이나 남았는데 노지에 배추를 그냥 둘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뽑아 서울로 가져올 수도 없습니다. 그건 직장에 다니는 아내를 은근히 압박하는 꼴밖에 안 되잖아요. 그러다간 자칫 김장 때문에 집안 분란만 일으키지요.

 

 

 

아내는 아직 김장 경험이 없습니다. 이런저런 구실로 시골에서 해 주시는 김장으로 여태 이렇게 저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런 형편이고 보니 김장에 대해 가타부타할 입장도 못 됩니다. 거기다가 김장을 하러 집도 아닌 안성까지 내려가는 일은 더 부담스러울 것입니다. 아내는 평소 안성에 내려가 무 배추 심고 키워온 나의 시골살이를 그리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런 마당에 자꾸 무 배추 이야기를 꺼낼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무 배추 쪽파를 마냥 외면할 수만은 없었던 모양입니다. 인터넷을 뒤지고, 주변 친구들에게 전화를 해 김장하는 법을 공책에 적어나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드디어 김장에 필요한 도구들을 다 준비했습니다. 무와 배추 씻을 큰 그릇들, 김치를 담글 김치통, 김장 도구, 양념들, 김장 후에 먹을 음식까지. 김장에 서툰 사람일수록 뭔가 챙기는 게 많습니다.

토요일, 점심 식사 후 아내와 챙겨놓은 짐을 차에 싣고 안성을 향했습니다. 아니 싫다는 아내를 모시고 간 셈이지요.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양지인터체인지에서 나와 백암까지 1 시간 15분 걸리는 거리입니다. 도착하자마자 날 어둡기 전에 배추를 뽑아 수돗물에 말끔히 씻었습니다. 공책에 적힌 대로 깨끗이 세 번.

 

 

 

 

애초에 배추 모종은 쉰 포기 했댔습니다. 살아나지 못한 모종도 있고, 또 간간히 몇 포기 먹는 일에 쓰기도 했습니다. 근데 막상 뽑아 놓고 보니 우리만 먹은 게 아닙니다. 배추벌레가 사람의 몇 곱절의 몇 곱절을 먹었습니다. 거의 다 그들이 먹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사람 눈을 속이고 한 마리씩 배추 속에 들어가 앉아 식성 좋게 한 포기씩 먹어치웠습니다. 그래도 손수 키운 것들이라 벌레들이 남긴 부분을 따서 깨끗이 씻었습니다.

그러고는 물 20리터에 소금 2킬로그램을 녹여 배추 숨죽이기를 했습니다. 아내가 메모지를 다시 꺼냈습니다. 숨죽이는데 12 시간이 필요하댔습니다.

 

 

 

 

 

“이젠 다 됐다. 내일 아침 두 시간만 김장하면 끝날 테지.”

나는 늦은 저녁을 먹고 방바닥에 길게 누웠습니다. 안 보던 연속극도 보았습니다. 그렇게 밤 9시 뉴스까지 보고 있을 때입니다.

“고춧가루를 안 가져온 것 같아.”

챙겨온 것들을 이것저것 뒤적이던 아내가 한숨을 내쉽니다. 그때부터 고춧가루를 넣었다는 연두색 가방을 찾기 위해 싣고 온 짐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뒤졌습니다. 차 안도 뒤졌습니다. 없습니다.

 

 

 

세상에! 김장을 하러 온 사람이 고춧가루를 안 가지고 오다니요. 집에 혼자 남은 딸아이한테 전화를 했습니다. 집에도 없다는 겁니다. 이런 낭패가 있을 수 있을까요. 집에다 두고 오기만 해도 모르겠는데, 고춧가루통 넣은 연두색 가방이 없다니 이걸 어찌합니까. 고향 형수님께서 손수 키운 고추로 만들어주신 것인데 그걸 잃어버렸다면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 야밤, 어느 가게에 가 고춧가루를 사야할까요.

시계를 보니 밤 열 시가 다 됐습니다. 서울에 도착하면 11시입니다. 고추가루 파는 가게는 문을 열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요. 새우젓이라면 안 넣고 김장할 수도 있겠지만 고춧가루를 빼고 김장을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도대체 짐을 어떻게 실은 거야?”

급기야 아내의 원성이 내게로 쏟아졌습니다. 거실에 챙겨놓은 짐을 마당에 내려 차에 실은 사람은 나였습니다. 참 할 말이 없습니다. 방법은 차를 몰아 어찌 되었든 다시 서울로 가는 길밖에 없습니다. 한심한 일입니다. 간신히 데려온 아내의 심기를 또 이렇게 건들고 말았습니다.

아마 짐 싣기 좋게 차를 이동시키느라 어딘가에 놓은 짐 하나를 찾아 싣지 않은 게 분명합니다. 이런 일이 처음이라면 모르겠습니다. 내게는 늘 있는 일입니다. 그러니 비난의 화살이 심각할 수밖에요.

나는 보던 텔레비전을 눈치껏 껐습니다.

 

 

 

 

 

차 키를 들고 집을 나서려니 아내가 혼자 무서워 못 있겠다며 따라나섭니다. 길을 나서려니 짙은 안개가 어둠과 함께 차 앞을 탁 가로막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고속도로가 위험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김장을 도중에 포기할 수도 없습니다.

참 이런 한심한 일도 다 있을까요. 전쟁터에 총을 잊어버리고 안 가져간 병사가 있었다는 말은 들었지만 김장하러 가는 사람이 고춧가루를 두고 갔다는 이야기는 처음입니다. 그 첫 인사가 바로 나입니다.

“당신이나 할 수 있는 일이지 뭐.”

아내가 빈정대며 길을 재촉했습니다.

안개와 돌풍과 폭우가 몰아치는 고속도로를 뚫고 서울로 간신히 올라왔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다행스런 일이 있었습니다. 연두색 가방을 찾았습니다. 내가 놓았던 아파트 계단 고 자리에 고대로 놓여있었습니다.

 

 

 

 

다음날 새벽 우리는 또 다시 안성으로 내려갔습니다. 생강은 안성에 가 있나? 마늘은 가 있나? 지금 우리가 신발은 신고 가나? 지갑은 가져가고? 휴대폰도 가져가나? 우리는 이 어처구니없는 고춧가루 사건 때문에 몇 번이고 싱겁게 웃었습니다.

부랴부랴 도착한 뒤 공부한 공책을 세워놓고, 순서에 맞게 깍두기를 넣고, 갓을 넣고, 무게를 달고, 쌀가루 풀을 넣은 뒤 간신히 김장을 마쳤습니다.

“초짜가 만든 김장치고 맛이 어지간하네.”

건넛집 할머니께서 맛을 보시더니 다행히 얼굴을 찡그리지는 않으셨습니다. 난생 처음 해보는 김장치고 아주 별난 김장을 다 해 보았습니다. 고춧가루 없이 김장을 하겠다고 덤빈 우리의 소행이 생각할수록 웃깁니다.

 

 

 

 

모두 김장은 하셨습니까. 하시느라 애쓰셨습니다. 혹 김장 안 하셨다면 꼭꼭 잘 챙기셔서 순서에 맞게 맛난 김장하시길 빕니다.

창을 내다보니 첫눈이 내립니다. 김장을 독촉하는 눈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