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수명 연장, 반갑기만 할까

권영상 2013. 11. 15. 12:35

 

수명 연장, 반갑기만 할까

권영상

 

 

 

 

 

 

해마다 주말농장을 얻어 푸성귀를 심어왔다.

봄에는 상추 등속을 키웠고, 여름이 끝나갈 무렵엔 배추 모종을 해왔다. 모종을 해놓고 한 주일이 지나 밭에 가보면 배추벌레 꾀는 걸 본다. 어쩌다 부득이한 일이 있어 두어 주 거른 뒤에 밭에 가면 배추가 엉망이다. 배추벌레란 놈들이 어린 배추를 다 갉아먹는다. 때로는 녹색 잎이란 녹색 잎은 다 갉아먹고 줄기만 앙상하게 남겨놓는다.

 

 

 

 

속에서 불같은 화가 치민다. 벌레를 잡는다고 밭에 앉는다. 그러나 실은 벌레를 잡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이는 화를 잡기 위해다. 사람인 내가 말 못하는 어린 벌레에게 화풀이를 한다는 게 어찌 보면 우습지도 않은 일이다. 내가 화풀이를 한들 상대가 미물인데 뭔 속이 시원하겠는가.

한 마리 한 마리 배추벌레를 잡으면서 생각을 바꾼다. 이 땅이 본디 사람이 아니라 벌레들 살던 들판이었음을. 그걸 사람이 빼앗아 경작지를 만들었으니 정작 화를 낼 이는 내가 아니라 벌레임을. 그러니 내가 혼자 배추를 키워 독식할 게 아니라 실은 반반씩 나누어먹어야 하는 건 아닐까. 그러며 내 안의 화를 달랜다. 선무당이 더 무섭다고 농사를 업으로 밥을 먹고 사는 것도 아닌데 그만한 일에 내가 더 흥분한다. 먹어도 그만이고 안 먹어도 그만인 그 일에 더럭 화를 내는 걸 보면 나는 숨길 수 없는 이해타산주의자다.

 

 

 

 

근데 대충 벌레를 잡아놓고 한 주일 뒤에 가보면 또 놀라운 일을 만난다. 갉아 먹혔던 배추들이 푸르게 자라 오른 걸 보게 된다. 그건 내가 벌레를 알뜰하게 잡아냈기 때문이 아니다. 그 사이 배추벌레들의 몸이 고치 속에 들어가 변태하고 있기 때문이다. 변태란 무엇인가. 기존의 몸을 완전히 뜯어고치는 일이다. 어떻게 뜯어고치는가? 교미하기 쉬운, 날개가 달린 몸으로 뜯어고친다. 날개로 날아오르려면 중량감 있는 배춧잎을 더 이상 먹을 수 없다. 그러고 보면 몸을 다시 설계할 때 외과만이 아닌 섭취와 소화방식까지 송두리째 고쳐야 한다. 리모델링 수준이 아니다. 위험요소가 따르는 일종의 재건축 수준이 변태다.

 

 

 

 

 

그런 위험한 과정을 통해 고치 속에서 나비가 나오면 그는 더 이상 배춧잎을 갉아먹을 수 없다. 구강 구조가 꽃잎 속의 꿀을 빨아먹도록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 덕을 본 자는 누구인가. 배추벌레인 나비다. 그리고 또 누구인가. 배추다. 배추는 이제 배추벌레의 방해 없이 온전하게 성장할 수 있다. 그런데 배추벌레가 이토록 위험이 뒤따르는 재건축을 시도하는 진짜 이유는 무얼까. 식량 위기 때문이다.

 

 

 

그건 어린 모종을 다 갉아먹은 배추를 보면 안다. 뼈만 앙상한 배추를 보면 배추벌레들은 굶주림의 위기감을 느낄 테다. 그들은 이 지상에서 자신들만 살아남으려 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먹이인 식물과 함께 공생하기를 원한다. 그 결과 그들이 찾아낸 방식이 변태다. 변태를 통해 식성을 식물성에서 단백질로 바꾸는 일이다. 그 결과 죽음 직전에 내몰렸던 배추와 나비는 다시 살아난다. 지혜롭지 않은가.

평생을 쌀과 밀과 육류만 먹어 식량을 고갈시키는 인간에 비하면 나비는 지혜롭다. 인간은 저들의 식량조달을 위해 숲을 벌목한다. 숲이 인류의 허파임을 알면서도 숲을 불태워 없애는 걸 볼 때면 지난 여름날의 꽃매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꽃매미는 가중나무의 수액을 빨아먹는다. 그들은 중부지방 전역에 걸쳐 자생하는 가중나무를 집중적으로 흡액한 결과 가중나무를 멸종 위기로 내몰았고, 동시에 꽃매미도 우리나라에서 멸종하고 말았다.

그러나 나비는 이 지상에 존재하는 이들과 함께 공생하는 법을 안다. 그러기 위해 자신들 스스로 고치 속에 들어가 위험한 변태의식을 치른다. 식량고갈 문제를 자연을 해치는 것이 아닌 자신들의 내부변혁을 통해 해결했다.

 

 

 

드디어 배추벌레는 나비가 되었다. 이제 그들은 자유로이 날아올라 부지런히 짝을 찾고 짝짓기에 들어간다. 그것은 그들이 이 세상에 온 존재 이유다. 종족을 번식시키는 일. 그들은 그들의 그 소임을 다하면 우리들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그들은 어디로 갈까.

자신들의 몸을 자연으로 되돌리러 간다. 연어가 그렇다. 산란이 끝나면 장렬하게 죽음을 맞는다. 사마귀도 교미와 함께 죽음을 받아들인다. 잠자리 또한 그들이 태어난 물속에 몸을 던진다. 교미를 끝내고 산란을 마친 나비는 어디로 갈까. 나비들의 죽은 몸을 나는 아직 본 적이 없다. 필시 그들도 그들의 생태 순환을 위해 쓰여질 곳에 찾아가 눈에 띄지 않게 몸을 던질 테다. 그들은 자신들의 아름다운 모습이 더 이상 추해지기 전에 서둘러 삶을 마치고 자연계로 돌아간다.

 

 

 

그런데 사람은 어떤가.

종족번식을 끝내고도 수십 년 동안 지상에 남아있다. 우리나라의 65세 이상 고령인구는 2010년 10.7%로 530만 명이며, 100세 이상 인구는 2011년 11월 통계에 의하면 1,836명이라고 한다.

남성의 평균 수명은 77.3세, 여성은 84세로 해마다 수명이 증가하고 있다. 언론에선 100세 수명 시대를 예고한다. 어떻게 보면 인간이 100년이나 산다는 건 반색할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수명 연장에 정작 반가워할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오늘따라 같은 지상을 사는 나비의 친자연적인 일생이 자꾸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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