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을 잘 쓰고 있습니다
권영상
집이 동남향이라 오후 2시쯤이면 해가 집을 비켜간다. 해가 들 때면 집안이 홧홧하다가도 해가 지나가면 금방 썰렁해진다. 그 느낌을 몸이 금방 안다. 하던 일을 놓고 방을 나간다. 갈 데가 있다. 텃밭이다. 텃밭은 남향 벽 아래 붙어있다. 늦가을 볕을 받은 남향 흰벽은 햇볕을 받은 만큼 텃밭에 홈빡 반사해낸다. 그러니 텃밭에 나가면 눈이 부실만큼 볕이 좋고, 양이 풍부하다. 잠시라도 해를 등져보면 등판이 따갑다.
이처럼 햇볕 풍부한 조건을 텃밭이 모를 리 없다.
쉰 포기의 배추와 두 이랑의 무, 한 두둑의 상추며 갓, 밭 귀퉁이마다 심은 쪽파, 저 혼자 자라난 단호박..... 텃밭은 풍부한 햇볕으로 그들 푸성귀를 돌본다. 다른 밭의 것들은 초록빛을 잃어가고 있는데 우리 집 텃밭만은 아직도 제 빛이다. 텃밭 안으로 끼어든 풀메뚜기, 방아깨비, 벼메뚜기 배추벌레들도 보듬어 안고 산다. 텃밭은 가을볕을 이토록 요긴하게 골고루 잘 쓴다.
이울어가는 갈볕을 잘 쓰는 곳이 또 있다.
백암 수정옥이 있는 근창로 뒷밭이다. 오늘 백암면 농협에 세금을 내고 오다가 샛길 끝에서 만난 곳이 그곳이다. 집들은 한길이 있는 동쪽을 향해 진을 치듯 늘어서 있고, 남향인 그들의 뒤뜰은 모두 밭이다. 밭은 오후의 아늑한 햇빛을 가득히 쌓아두고 있다. 나는 풀내나는 그 밭고랑길을 걸었다. 얼굴이 후끈할 만치 공기가 덥다.
거기엔 회청색 대파가 한 밭자리, 풍부한 가을볕을 요긴히 쓰고 있다. 그 곁엔 빨간 끝물고추가 세 이랑인가 네 이랑 있다. 어찌나 고추빛이 좋은지 도저히 매워 보이지 않는다. 맵기는커녕 주황에서 빨강으로 넘어가는 빛이라 고아하다.
세상의 들판이 무서리에 녹아내리는데 여기만은 다르다. 푸른 호박덩굴도 한 무더기 누워있다. 이런데서 만나는 호박꽃은 얼마나 친근해 보이는지 먼 친척 아주머니 같다. 호박덩굴 속을 들여다 보니 새파란 애호박이 가을볕을 풍족히 쓰면서 살을 찌우고 있다. 꽃이라면 호박꽃만이 아니다. 밭둑에 박아놓은 말뚝을 타고 호콩도 꽃을 피웠다, 보랏빛. 호콩은 햇빛 중에서도 보랏빛만 골라내어 벌이나 나비를 유혹하는 색깔로 쓴다.
암만 보아도 여기는 늦가을이 아니다. 이제 가을의 문턱을 갓 넘어선 모습이다. 고들빼기란 놈이 아지를 얼마나 벌였는지 댑싸리 만큼하다. 머리 위엔 철 모르는 아이처럼 노란 꽃을 토닥토닥 달고 있다. 야무지게 빛을 쓰는 이들의 모습이 착하다못해 정겨워 나는 근창로 뒷밭을 떠나지 못하고 한참을 서성거렸다.
해가 오후 쪽으로 총총총 기울어갈 때 근창로 뒷밭을 나와 청미천 둑에 올라섰다. 산수유 가로수가 짙붉다. 개천둑은 해와 정면을 하여 길게 누워있다. 둑비탈에 쑥쑥 키가 커오른 쑥대며 수크렁들이 한 세상 살고난 씨앗을 여물리고 있다. 개천 바닥의 억새들도 씨앗을 익히기 위해 햇볕을 아껴 쓰고 있다. 도깨비 실바늘을 꽂고 있는 가막살이도 이때를 놓치지 않고 씨앗을 익힌다.
얼핏 보기에 개천둑은 온통 마른 쑥대빛깔이다. 겨울 쪽으로 다가선듯 하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아니다. 키 큰 풀섶 아래에 숨어피는 꽃들이 있다. 이들은 키 큰 풀에 가려 숨죽여 지내다가 이때에 와서야 비로소 생명활동을 한다. 노란 꽃을 피워문 난쟁이만한 달맞이꽃이 애처롭게 폈다. 난쟁이만한 노란 감국도 초췌하다. 개천둑 비탈에 내려서니 어쩌자고 민들레꽃이 또 호젓이 폈다. 말라버린 길죽한 대궁이 끄트머리에도 샛노란 뚱딴지꽃 한잎이 펴 있다. 마치 지금이 한창 때인 것처럼 망초꽃도 보기좋게 폈다.
다들 생을 마치고 떠나가는 그 뒷자리에 남아 안간힘을 쓰듯 마지막 꽃을 피운다. 뒷자리에는 여백만이 남는 게 아니다. 눈길 한번 받지 못하고 살아온 생명들이 남들 다 쓰고 남은 빛을 주어모아 저희들끼리의 늦가을 오후를 즐긴다. 마치 관객 없는 경기장에서 게임을 하고 있는 프로구단의 2부 리그 선수들의 비애를 보는 듯 쓸쓸하다.
‘그나마 남은 빛을 잘 쓰고 있습니다.’
개천둑에서 누군가 오후의 해를 향해 인사를 드리는 소리가 난다.
돌틈에 피어난 콩제비꽃 목소리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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