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아내를 서울로 보내며 꽃씨를 받다

권영상 2013. 10. 28. 16:18

아내를 서울로 보내며 꽃씨를 받다

권영상

 

 

 

 

 

 

토요일이다. 목요일에 내려왔으니 머문 지 사흘이 지났다. 안성의 밤은 위도가 낮은데도 서울보다 춥다. 그 대신 한낮의 볕이 굵고 곱다. 시골 볕이라 깨끗하고 환하다. 내려올 때마다 할 일을 싸들고 오는 바람에 좀 쉬자, 하면서도 쉬지 못한다. 끼니때마다 밥해 먹으랴, 청소하랴, 논벌에 나가 남의 집 추수하는 벼 구경하랴 바쁘다.

볕을 보러 텃밭에 나가 배추벌레를 잡고 있는데 아내한테서 문자가 왔다.

 

 

 

“오픈 끝나면 집에 돌아가 깍두기 담글 거야.”

깨끗한 시골을 구경하며 좀 쉬면 좋을 텐데 아내도 늘 바쁘다. 오늘 오후 5시, 예술의 전당에서 그림 전시회 오픈이 있다. 아내도 그 전시회에 작품을 냈다. 지난 달 아내는 퇴근을 하면 거기에 매달려 살았다.

이번에도 안성 내려올 때 아내는 딱 부러지게 말했다.

“토요일 나 못 내려가.”

오픈이 있는 날이면 뒤풀이가 있고, 집에는 늦어야 들어온다. 억지로라도 안성에 내려와 몸을 쉬게 하면 좋을 것 같은데 아내는 아니다. 집 이외의 장소는 누가 밥을 지어 먹여준대도 성가셔한다.

 

 

 

“일정대로 해. 내 걱정 말고.”

내색은 안 했지만 안성에 안 가겠다는 말이 귀에 거슬렸다.

안성에 집을 구해 오르내린지 두 달째다. 그 동안 아내는 당신이 좋아 얻은 집이니까 내 눈치 볼 것 없이 당신 좋을 대로 오르내려, 그랬다. 그러면서도 때로는 동행하지 못하는 게 미안하기도 한 모양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대체로 안성에 있고, 아내는 서울에 있다.

 

  

 

 

밤 9시다. 오픈이 끝나고 뒤풀이도 끝나갈 시간이 됐을 때다. 아내한테서 전화가 왔다. 지금 집으로 가고 있는 중이란다. 그러면서 내일 아침 날씨가 좋으면 내려갈지도 모르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내일 올 거면 오늘 내려와 쉬고 가지, 하는 야속한 마음이 들었다. 집에서 가까운 남부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타면 한 시간 거리다.

‘참 쉬지 못하는 성미야. 이 밤에 깍두기는 또 무슨 깍두기.’

나는 미루었던 저녁 설거지를 했다.

그러고 방 정리를 하고 있을 때다. 아내한테서 다시 전화가 왔다. 안성 집 앞에 와 있단다. 버스를 타고 왔다면 백암에서 내려 차를 태워달라고 내게 전화를 했을테다. 그런데 집 앞은 무슨! 나를 놀리려고 그러는 모양이었다. 나는 전화를 끊고 태연히 오늘 신은 양말을 빨았다.

 

 

 

 

“똑! 똑! 똑!”

그럴 때쯤이다. 누가 노크를 한다. 문을 열고 내다보니 아내다. 아내 말이 맞다. 아내가 왔다. 고속도로를 한 번도 타 보지 않은 아내가 손수 차를 몰고 왔다.

대체 냉장고 속을 어떻게 해놓고 사는지 그게 궁금해 한번 내려올 거라던 아내가 왔다. 아내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냉장고 문부터 열었다. 하루 종일 바쁘게 일정을 보냈을 아내가 또 늦은 밤 냉장고 정리를 시작했다. 일이 많은 아내는 어디 가든 일이다.

다음 날 아침에도 마을 사람들이 가꾼 가을들판을 구경 가자 했지만 텃밭의 상추나 한번 간신히 봤지 집안 정리를 하느라 쉬지 않았다.

 

 

 

 

그러고 또 올라갈 시간이 다 됐다.

오후 3시.

버스를 타고 내려올 때엔 내가 차에 태워 10분 거리인 백암에 데려다 주었다. 그런데 차를 몰고 왔으니 내가 할 일이 없다. 그렇다고 여기까지 밤길을 온 아내를 집 마당에 서서 잘 올라가라고 작별할 수는 없었다.

“요기 마을 어귀까지 날 태워줘.”

나는 거기서 잘 가라고 작별할 생각이었다.

“거기까진 왜?”

“거기 가 꽃씨 좀 따려고.”

거기 입구에 프랜치마리골드가 길 양옆으로 가득 피어있었다.

결국 아내는 나를 태우고 가다가 그 입구에서 나를 내려줬다.

 


 

 

“조심해서 잘 올라가. 가면 전화하고.”

내 말에 아내가 알았어, 하고는 미끄러지듯 한길을 달려나갔다. 나는 길 위에 혼자 남아 아내가 몰고 가는 차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순간, 왠지 목울대가 꾹 막혔다. 그러더니 난데없이 눈물 한줄기가 울컥 나왔다. 그건 왜였일까. 왜 아내를 보내고 혼자 남은 내 몸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아내와 30년이 넘도록 같이 부대끼며 살았는데 이 짧은 헤어짐에 내 몸이 왜 이럴까. 30년 중에도 반은 까닭 없이 싸움을 하며 살아온 인생이다. 그런 인생을 살고 있는데도 이런 그리움이 일어나는 것인가.

 

 

 

신혼 초다.

그때 나는 강원도 묵호에 직장이 있어 거기서 살았다. 그때 아내는 경기도 성남에 직장이 있어 집을 세곡동에 두고 살았다. 나는 한 주일에 한번, 때로는 이 주일이나 한 달에 한 번씩 오르내렸다. 이른바 주말부부였다. 그 주말부부를 무려 3년이나 했다. 그때 아내는 몸이 안 좋은 상태였다. 그래도 간혹 묵호에 있는 내 하숙집으로 내려오거나 아니면 주로 내가 세곡동으로 갔다.

힘들게 만났지만 하룻밤을 자고나면 살던 곳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그때 우리가 타던 고속버스는 주로 막차였다. 막차에 올라탄 나를 떠나보내며 혼자 남은 아내는 창밖에서 내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때로는 나도 아내에게 그랬다. 그때가 신혼 때라 작별이 사람을 더욱 힘들게 했다. 어쩌면 그 30여 년 전의 과거가 오늘 불현 떠오른 모양이다.

 

 

 

 

나는 혼자 남아 이제 시들어가는 프랜치마리골드의 씨앗을 받았다. 손안에 씨앗을 털어 넣다가도 아내가 가던 길을 바라보았다. 그 시각 가을볕은 눈부시게 빛났고, 늦게 피는 마리골드의 밝은 노랑 빛은 곱다 못해 마음을 아리게 했다. 아내는 그런 가을을 배경으로 나를 떠나 서울로 올라갔다.

나는 꽃씨를 받다가 길섶에 쪼그려 앉았다. 그러고는 까닭 없이 조각돌로 아내의 이름을 땅바닥에 썼다. 참 촌스럽고도 유치한 감정이 내게서 일어났다. 그 이름 위에 눈물 한방울이 떨어졌다. 그때 나를 올려다 보던 길섶의 여뀌풀꽃이 부끄러워 나는 눈물을 감추고 일어섰다.

 

 

 

 

그러고 사흘 뒤다. 엿새 만에 서울로 올라갔다.

저녁을 먹고 창밖으로 모여드는 어둠을 보고 있는데 아내가 내게 다가왔다.

“그날.”

아내가 그 말을 했다.

나는 그날이 아내가 안성에 왔다 올라오던 날임을 직감했다.

“나, 당신 별로 안 좋아하잖아.”

"......."

“그런데 그날.”

그 말을 하고 아내의 목울대가 울컥했다.

“당신을 거기 두고 혼자 오며 울었어.”

그러고는 돌아섰다.

“나중에라도 같이 살다가 같이 가야겠다, 했어.”

아내가 그런 말을 했다.

나는 뜻밖의 일에 아무 말도 못하고 서 있었다.

 

 

 

서로 다른 세월을 살아온 남녀가 만나 같이 살면서 부부가 된다는 것이야말로 참 지난한 일이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알게 모르게 부부 정을 들여가는 일임을 나는 이즈음에야 안다. 결혼을 해서도 나는 오랫동안 나를 잃어버리기 싫어 내 방식대로 살았다. 그러느라 아내는 마음고생이 심했다.

“이과 남편들은 오직 가족만 안다는데…….”

아내는 가끔 그런 말을 한다.

나는 산다는 일에 고민이 많다. 그냥 편하게 살면 될 일에 괜히 회의를 품고, 따뜻하게 살면 될 일에 괜히 추운 밤을 자초하고, 배불리 숟가락을 들다가도 그러는 내가 미워져 나를 구박하며 살았다. 그렇게 어설픈 인생을 살았으니 아내는 그런 내가 좋을 리 없다. 안성에 추운 집을 구해 좀 불편하게 살아보겠다는 내 모양을 아내가 또 좋아할 리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