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변할 줄 알았는데 변한 게 하나도 없어요

권영상 2013. 10. 20. 12:40

 

변할 줄 알았는데 변한 게 하나도 없어요

권영상

 

 

 

 

 

엊저녁이다.

퇴근하고 온 딸아이가 간밤에 꾸었다는 꿈 이야기를 했다. 오늘 하루도 다 지나갔으니 꿈 이야기를 꺼낸다면서.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오고 있는데 갑자기 자동차가 저한테 달려들었다는 거다. 죽은 줄 알고 막 울다가 간신히 눈을 떠 보니 오른 팔이 없어졌더란다. 꿈이 망측해 듣는 나도 좀은 섬뜩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 인터넷을 뒤져보니 부모 중 한 사람에게 불행이 닥칠지 모를 꿈이라 하더란다. 오른 팔이 없어진 걸 보아 불행한 운수를 당할 사람이 부모 중에 아버지인 나 같았다. 조심하라고 꿈 이야기를 했다지만 듣는 내 기분이 좀 찜찜했다.

 

 

 

그 밤을 자고, 아침에 메일함을 열었다. 메일을 주고받는 이들 중 세 명한테서 메일이 와 있었다. 그들이 보낸 메일을 열었다. 세 사람의 편지 내용이 모두 죽음에 관한 것이었다. 이런 메일 받으려고 그런 꿈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구나 했다. 한 사람은 절친한 친구가 세상을 떴다면서 부디 건강히 잘 지내라는 내용이었고, 먼 남의 나라에 가 사는 친구에게서 온 편지는 매형의 부음을 전화로 받은 이야기를 하면서 말 한마디 없이 툭 세상을 떠나가는 그 인생사의 허전함을 전해왔다.

나이 20대 후반의 제자에게서 온 편지에도 그런 죽음의 소식이 담겨있었다. 그이는 내가 심사한 모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된 분으로, 그때 그 고마움을 못 잊어 가끔까금 메일로 소식을 전하는 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을 다니는 미혼의 여류이다. 그의 편지 내용은 이렇다.

 

 

 

 

이런 우울한 이야기를 선생님께 해드려도 되나 모르겠다. 슬픈 마음을 선생님께 풀어 내 마음을 달래보고 싶다. 또 왜 그토록 오랜 날 동안 메일을 못 드렸는지 그 연유를 알려드리기 위해서도 이 이야기는 꼭 해야겠다.

그러면서 그 우울하고도 슬픈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간 몸이 안 좋으시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거다.

나는 그 말에 좀 놀랐다. 큰 딸이 20대 후반이면 아버지는 아직 한창 젊은 나이일 테다. 무엇보다 그분의 죽음이 안타깝고 안쓰러웠다.

“선생님, 근데 너무 놀라워요.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도 변한 게 하나도 없어요. 변한 게 하나도 없어서 그래서 더 슬퍼요. 해도 뜨지 말고 달도 뜨지 말아야 되는 거 아닌가요?”

나는 그 편지를 읽으면서 아버지를 잃은 그의 슬픔이 얼마나 큰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나도 서른 중반에 아버지를 잃었다.

그때 나는 서울에서 대관령을 넘어 고향 강릉에 다다를 때까지 버스에서 연실 울었다. 대답없이 누우신 아버지 앞에서 나는 완고한 형님들에게 통사정을 했다. 제문은 아버지 일생을 누구나 들어 쉽게 알 수 있도록 한글로 써야한다고 우겼다. 흙에서 태어나 무지렁이처럼 사시다가 흙으로 돌아가시는 아버지 일생이 너무 서글펐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무렵, 나는 늦은 나이에 한 살짜리 딸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아버지 밑에서 30여 년을 성장했지만 아직 그 아버지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런 나이에 내가 가 있었으니 더욱 아버지의 죽음에 통한을 느꼈다.

아버지는, 아버지가 되어 많은 가족을 먹여 살리려고 흙에 매달려 이름없이 사셨다. 거기다가 아버지의 아내인 어머니의 수십 년간의 병석을 오래도록 지키셨다. 지어미의 병수발을 드시다가 어느 정도의 완쾌를 보시자, 그만 아버지는 세상을 뜨셨다. 그러니 그분의 생애야말로 고된 노동과 고된 우환에 짓눌려 하루도 편할 날 없이 사신 고된 세월이었다. 그 생각을 할 때마다 아버지도 모르는 내가 아버지가 된 일에 눈물겨워했다.

 

 

 

 

아버지의 죽음을 20대 큰딸이 받아들이는 절망감 또한 크고도 클 것이다. 그의 말대로 아버지의 부재 이후의 세상엔 해도 뜨지 말고 달도 뜨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아버지의 존재감의 무게를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해와 달은 커녕 자신들의 일상에서조차 아무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늘 자식들의 바깥을 도는 아버지. 한 식구이면서도, 그 아버지의 노동에 얹혀 밥을 먹고 살면서도 자식은 그 아버지와의 좁혀지지 않는 거리에 놓여있다. 자식은 그 아버지의 나이를 먹어야 비로소 그 아버지와 근접해진다는 말을 더러 듣는다. 자식에게 있어 아버지란 이해하기 힘든 난해한 시와 같다. 그런데 딸이 느끼는 거리감은 어떨까.

나이 스물. 미처 부녀간의 거리감을 이해해 보기도 전에 아버지의 부재와 맞부딪힐 때의 망연함, 어쩌면 그것 때문에 그는 아버지 사후의 변하지 않는 세상이 슬펐을지 모른다.

 

 

 

 

참으로 사람 사는 세상의 일이란 모두 무상한 것이다.

내 나이 쉰을 넘긴 뒤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 때의 슬픔은 서른 중반에 아버지를 잃었을 때와 또 달랐다. 충격도 덜하고, 상실의 절박감도 덜했다. 나도 사는 일에 휘둘려 그런지 그저 담담했다. 오랜 타지 생활 탓인지 어머니를 산중에 모시고 와서도 여전히 고향집에 어머니가 계시겠지, 했다. 명절이나 볼일이 있어 고향에 들를 때에야 비로소 어머니의 부재를 실감할 뿐.

그 사이 작별 연습이 심심찮게 많았다.

 

 

 

 

 

태풍이 가고 난 뒤면 동네 우면산 산비탈에서 쓰러진 나무들을 본다. 가지가 많고 잎이 무성한 나무들도 자연의 위력 앞에선 무기력하게 쓰러진다. 쓰러져도 제 한 몸만 홀연히 쓰러져 떠나가는 게 아니다. 쓰러지느라 주변의 나무들도 쓰러뜨리고, 한창 크는 나무들의 중둥이도 부러뜨리고, 주변 어린 나무들의 허리를 짓누르며 쓰러진다. 그래서 나무 한 그루 쓰러진 자리에 가보면 격전지처럼 주변 나무들의 상처가 크다.

그들이 쓰러진 자리에 서서 하늘을 쳐다보면 안다. 하늘 한 자락에 텅 비어있다. 아예 산의 한 모퉁이가 파여나간 것처럼 휑하다. 사람이나 나무나 그가 떠나간 자리는 그토록 크다. 그러나 잔인하게도 서너 달만 지나면 그 빈자리도 주변 나무들이나 커오르는 어린나무들에 의해 메워지고 채워진다. 누군가 떠나간 아무 흔적도 없다. 그 때마다 자연의 복원력에 감탄하면서 한 사람의 죽음 이후의 세상이 또한 그러함을 본다.

 

 

 

이러한 자연과 인간의 내력을 늘 보아와서 그런가.

큰나무가 쓰러진 걸 보면 자연스럽게 그걸 인생의 한 부분으로 이해하게 된다. 그때는 슬프겠지만 그때도 자연스럽게 지나가게 되고, 그때는 절망했지만 그때도 결국 자연스럽게 지나가게 됨을. 그러나 본인이 없어도 사후의 일이 그처럼 별일없이 복원되고 만다는 사실에 인간은 허전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