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트럼펫소리에서 향수가 인다

권영상 2013. 10. 10. 14:00

 

트럼펫소리에서 향수가 인다

권영상

 

 

 

 

 

화요일 오후, 베란다에 나가 창밖을 본다. 태풍이 가고난 뒤의 하늘이 파랗다. 눈이 어리다. 더 이상 직장이 싫어 직장을 집어던지고 나왔지만 이런 날엔 손가락만한 직장이라도 있어줬음 싶다. 미워하는 사람이나 싫어하는 일 때문에 내가 좀 긴장해 보고 싶다. 그런 것들조차 그리워지는 날이다.

아파트 마당에 나왔다.

보기좋게 큰 느티나무 밑에 들어선다. 없던 바람이 그늘 속에서 일어나 나를 흔든다. 마당엔 사람 하나 없다. 맨드라미만 붉게 피고 있다.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가을상추는 잘 크는지 할 일 없이 주말농장으로 향한다. 양재역을 지나고 청계산 아래 원터골을 지나다가 청계골 입구에서 차를 멈추었다.

 

 

 

 

 

청계산이 자꾸 나를 잡아당긴다.

산에 들어설 때까지도 사람이 없다. 그러고 보니 화요일, 이 주중에 산을 오를 사람은 직장이 없는 나뿐이다. 다녀볼 만큼 직장을 다녀보고도 가끔 직장이 그리울 때가 있다. 일에 묻혀 지내다가 그 일을 탁 마치고 날 때면 더욱 그렇다.

좁은 소로를 따라 산비탈을 오른다.

참나무숲 사이로 잘 익은 가을볕이 쏟아져 내린다. 그 볕에 들어섰다가 나섰다가 하면서 반쯤 올랐다. 싸리나무 숲에 둘러싸인 오래 묵은 샘터가 나온다. 거기 돌로 만든 벤치에 앉아 내 몸을 쉬게 한다. 샘에서 또록또록 샘이 떨어져 나온다. 칡잎을 따 컵을 만들어 한 모금 샘물을 채워 마신다.

 

 

 

 그때, 어디선가 트럼펫 소리가 난다. 저쪽 원터골 쪽 산언덕이다. 이 깊다면 깊은 산중에서 난데없이 울려나오는 트럼펫 소리가 유난하다. 내 귀가 그 금속성 트럼펫 소리를 한 걸음 한 걸음 따라간다.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뿜은 담배연기처럼.”

나는 칡잎에 샘물을 채우다가 멈춘다. 아는 노래다.

“작기만한 내 기억 속에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나는 물끄러미 칡잎에 채워지는 샘물을 바라본다. 또록또록 이 거대한 산의 숨소리 같은 샘이 떨어진다. 나는 그걸로 내 비어있는 내면을 채워보려는 듯 연실 샘을 받는다. 떨어지는 물이 적지만 잠시 뒤면 그마저 칡잎을 채운다. 나는 손끝이 젖도록 채운 샘물을 고개를 젖혀 들이마신다. 내 눈에 보이는 파란 하늘. 나는 내 목숨이라는 컵에 무엇을 채우느라 여기까지 달려왔을까.

샘물을 받아먹던 칡잎을 버린다.

 

 

 

 

 

벤치에 다리를 꼬고 걸터앉는다. 누가 부는지 그 날카로운 금속성 소리가 끊겼다 이어졌다 하면서 날아온다. 나는 괜히 그 소리의 마법에 빠져든다. 소리가 끊기면 궁금하다. 그러다가 일어나 소리가 날아오던 방향을 바라본다. 마을 쪽으로 내리달리던 산등성이가 뚝 끊긴 언덕이다. 능성이의 숲이 왠지 까칠하다.

 

 

  

17살, 어머니 입원 탓에 고등학교 진학을 못한 채 빈둥거릴 때다. 나는 늘 집 뒤에 있는 경포 호숫가에 나갔다. 그때도 지금처럼 나는 혼자였다. 혼자인 것이 당연한 것인 줄 알만큼 나는 혼자 호숫가를 맴돌았다. 싫도록 호숫물을 바라보고, 싫도록 호수 건너편 마을을 바라보고, 싫도록 남으로 흘러가는 대관령을 바라보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것이 외로움 때문이었다.

그 때에도 가끔 호수 건너편 마을 산 언덕에서 트럼펫 소리가 났다. 트럼펫 소리는 이국의 철새처럼 호수 위를 날아 푸른 하늘을 흔들어대면서 이쪽으로 날아왔다.

“저 사람도 나처럼 외로운가 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쪽에 서 있는 나는 여기가 외로워 호수 건너편을 바라보고, 호수 건너편의 그 누구는 그쪽이 외로워 이쪽을 향해 트럼펫을 분다고 여겼다. 목 마르도록 맑은 날이면 햇빛이 괜히 눈부셔지고, 하늘이 유별나게 파래 보이고, 아무도 없는 곳을 향해 이유도 없이 소리치곤 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게 17살 외로움이었다.

 

 

 

 

뚝 끊겼던 트럼펫 소리가 다시 울려온다. 처음서부터 다시 노래가 시작된다. 그러다가 아까 그쯤에서 또 뚝 끊긴다. 가을로 접어드는 산이 미궁을 헤매듯 흔들리다가 깊어진다. 또 적막해진다.

나는 나를 압박하는 적막이 무거워 일어선다.

산을 내려가며 트럼펫이 남기고간 여운을 되뇌인다.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몇 번 되뇌이다 멈춘다.

나이를 많이 먹었을 때에도 17살 시절처럼 외로울 때가 있었다. 계절이 지나가듯 내 마음에도 굵은 자국을 내며 그 외로움이 지나갔을 테다. 그 때 나는 어떻게 외로움을 참아냈을까. 생각해 보니 산에 올라와 트럼펫을 부는 사람처럼 그렇게 외로움을 소리쳐 본 적이 없다. 그저 내가 아는 술로 나를 어르고 달래고 추스르고 말았다. 나는 나를 위해 적극적이지 않았으니까. ‘사람 사는 세상 다 그런 거지 뭐’ 라거나 ‘스치고 지나가는 한 때의 사소한 아쉬움이지’ 그러며 그저 나를 잠재우기에 급급했다.

 

 

 

 

 

길옆 참나무 가지에서 붉게 물들어가는 참나무잎을 본다.

그 위에 내 나이가 문득 어린다. 늘 내게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나는 벌써 한 세상을 충분히 산 붉은 참나무잎처럼 많은 나이를 먹고 있다. 흘러간 시간의 저 편에 서 있는 내 몸에서 아득한 향수가 인다. 선생님께 6.25 전쟁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떼를 쓰던 그 옛날의 어린 소년이 이렇게 먼 길을 걸어 여기까지 왔다.

 

 

 

트럼펫을 포켓에 넣어 이 산중까지 짊어지고 온 그 사람에겐 어떤 외로움이 있었을까. 세상을 향해 그렇게 소리쳐 불지 않고 배길 수 없는 아픔이 있다면 그건 어떤 아픔일까.

지나가는 바람에 노란 나뭇잎 하나 슬쩍 진다. 투명한 생강나무 잎이다. 생강나무 잎이 작은 바람에도 힘없이 질 때다.

산을 다 내려와 내가 걸어내려온 청계산을 올려다 본다.

내가 걸어오르고 걸어내린 아무 흔적도 없이 꾹 입을 다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