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버스커버스커, 수채화 같이 가벼운 도시의 사랑

권영상 2013. 10. 3. 14:02

버스커버스커, 수채화 같이 가벼운 도시의 사랑

권영상

 

 

 

 

 

눈부신 오후의 창문을 열 때 커텐 자락이 바람과 함께 내 얼굴을 휩싼다. 그러고는 또 언제 그랬냐 싶게 슬그머니 제 자리로 돌아갈 때 내 눈에 보이던 파란 하늘. 구름 한 장 없는 하늘이지만 선을 긋고 간 제트비행기의 하얀 금처럼 선명하게마음에 남는 노래.

버스커버스커의 “처음엔 사랑이란 게”가 그렇다. 수채화 같이 가벼운 도시의 사랑, 그렇게 이 노래를 한 마디로 말해도 될까.

보컬 그룹 버스커버스커가 지난 달 25일 1년 6개월이라는 긴 공백 이후, 두 번째 앨범을 냈다. 발표하자마자 음원차트마다 1위를 석권하고 있단다. 더욱 놀라운 건 1위에서 9위까지가 모두 2집 앨범에 수록된 곡이라니 다들 버스커버스커에 쏠리는 모양이다.

 

 

“나에게 사랑이란 게 또다시 올수 있다면.”

아파트 계단을 걸어 내려올 때다. 나보다 한 층 위의 계단을 걸어내려오면서 누군가 장범준 특유의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나는 그 쉽고도 가벼운 노래를 더 오래 들으려고 걸음을 천천히 하여 4층을 다 내려왔다. 목소리는 내 뒤를 따라 내려와선 나와는 반대 방향으로 나간다. 돌아다 봤다. 청바지에 카키색 남방을 입은 청년이다. 스무 살은 될까. 휴일 오후, 애인이라도 만나러 나가는 건 아닐까.

 

 

“벤치에 앉아있는 그녀 모습 속에는

오, 난 그 어떤 그리움도 찾아볼 순 없군요.

벤치에 들려오는 그녀 웃음 속에는

오, 난 그 어떤 외로움도 찾아볼 순 없군요.”

 

 

 

이 노래의 배경엔 모던한 도시의 거리가 있다.

가을볕 투명한 가로수 아래 벤치에 앉아 있는 ‘그녀’에겐 그리움도, 외로움도 없다. 어쩌면 그런 감정 따위는 더 이상 필요없다. 그녀는 청순하다. 그녀는 근심 걱정 없는 산뜻한 그녀이면 된다. 억지 꾸밈도 필요없다. 그냥 수채물감 빛 티셔츠에 청바지면 된다. 학교 도서관도 시립도서관도 아닌 쿨한 거리의 벤치에 다리를 꼬고 앉으면 족하다. 굳이 취업용 수험서를 끼고 있지 않아도 되고, 빈티를 보이지 않기 위해 정장을 갖추어 입을 이유도 없다. 그녀는 도시의 외벽처럼 그냥 산뜻한 그녀이면 된다.

 

 

 

30대에겐 직장이 없고, 40대에겐 '나'가 없다는 말이 있다. 미래는 있으되 미래가 없는 세대가 20대란다. 힘들게 대학은 나왔으되 취업에 도움이 안 되고, 죽어라 입사원서를 써보지만 족족 떨어진다. 비싼 등록금과 성형수술비로 날마다 카드빚에 쪼들려 사는 게 불행한 20대다. 살아있다는 자체가 사치스럽고, 도무지 행복할 것 같지 않은 게 그들이다. 그러고 보니 그들이 왜 버스커버스커를 사랑하는지 알 것 같다.

 

 

 

도시의 여자란 영혼이 없어보일 만큼 산뜻하고 심플하다. 도시의, 처음으로 사랑을 아는 남자란 생각이 없고 어리석다. 그래서 인생을 얕보고, 사랑을 얕보고, 여자를 얕본다. 나중 다시 사랑한다면 ‘가깝진 않게 그다지 멀지도 않게’ 사랑하겠단다. 바보스럽다. 그런 사랑은 이제 더이상 도시의 사랑이 아니다.

그러나 사랑을 하기엔 바보 같은 남자가 좋다. 어차피 직장이 없고, 멋진 승용차가 없고, 신혼아파트 마련할 능력이 없을 바에는 잔머리 굴리지 못하는 단순한 남자가 좋다. 도시의 사랑은 카톡에 날아오는 문자처럼 가볍게 만나 가을 물빛 같이 속삭이다가 산뜻하게 작별할수록 좋다. 그게 "처음엔 사랑이란 게"가 꿈꾸는 도시 사랑이 아닐까 싶다.

버스커버스커의 단조롭고도 가벼운 노래의 이면에 그런 무거운 슬픔이 있음을 본다. 그래서 기이하도록 음원차트를 모두 휩쓰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