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교미의 계절
권영상
마당 잔디밭에 나가 잠시만 앉아보면 교미 중에 있는 벌레들 만나기가 어렵지 않다. 녹색의 몸을 한 암수 두 놈이 녹색 풀밭에 저들 몸을 숨기고 은밀히 교미를 한다. 손으로 풀 위를 쓱 헤집으면 이들은 방해자의 방해가 성가신 듯 풀쩍 날아올라 자리를 옮겨 앉는다. 주로 방아깨비다. 풀메뚜기나 풀무치 등도 흔히 보인다.
이들의 체위는 단순하다. 든든하고 큼직한 체격의 암컷 위에 작고 왜소한 수컷이 올라탄다. 얼핏 보아 이게 교미하는 모습인지 아니면 업고 장난치는 모습인지 모를 지경이다. 암수의 체격 차이가 현저하기 때문이다.
가만히 지켜보면 이들의 교미 시간이 짧막하지 않음도 알 수 있다. 그것은 하등동물인 이들의 동정 포인트identification point 때문이다. 그러니까 수컷의 생식기 끝에 있는 갈고리가 암컷의 성기에 꼭 물리게 하는, 이를테면 같은 종족끼리만 교미를 가능하게 하는 특성 때문이다. 그러니 덩치큰 일반 포유류들과는 달리 당연히 교미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
점심을 먹고 설거지통에 생긴 음식물 찌꺼기를 담아들고 집 옆 배추밭으로 갔다. 거기 적당한 곳에 호미로 흙을 파고 음식물 찌꺼기를 버려왔다. 거름도 할 겸 쓰레기 배출량을 줄여볼 생각에서다. 호미로 찌꺼기를 덮고 난 뒤 일어서려는데 배추밭 둘레에 크는 콩포기 콩잎에 이상한 광경이 보인다.
노린재란 놈 두 마리다. 세모 모양의, 어깨가 탄탄해 보이는 갈색 노린재다. 그들은 가을볕에 콩이 익어가는 콩포기에 숨어 교미 중에 있다. 아무도 없는 이 한적한 때를 골라 음란한 짓이다. 두 마리가 아니고 세 마리다. 본디 암컷과 수컷이 숨어 교미를 하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새로운 수컷이 달려들었다.
그 녀석은 이들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는 나와 달리 염치 불구하고 그들에게 덤벼든다. 앞발로 수컷의 어깨를 그러잡고 끌어내린다. 사람의 일로 본다면 예의없고 망측한 일이다. 그렇다고 교미 중에 있는 수컷이 그 일을 포기하고 순순히 암컷을 넘겨줄 리 없다. 그는 지금 중대하고도 아주 중대한 일을 치르고 있다. 이 세상에 와 자신의 유전자를 암컷의 몸에 남기고 있는 중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목숨들 중에 가장 큰 임무는 자신의 우성인자를 이 세상에 퍼뜨리는 일이다. 그러니 그 일을 쉽사리 포기할 수컷이 어디 있을까. 그는 떨어지지 않으려고 암컷을 그러잡는다. 그러나 새로 나타난 강적도 만만치 않다. 이길 가능성을 보고 달려드는 거니까 쉽게 돌아설 놈이 아니다.
끌어내리려는 수컷과 암컷 몸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수컷의 싸움.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에선 자신과 관계를 하고 있는 남자를 붙잡아 주거나 아니면 유리하도록 상황을 조성해 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암컷 노린재는 앙큼하다. 꼼짝도 않고 가만히 있는다.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두 수컷의 싸움박질을 즐기고 있는 모양새다.
드디어 새로이 나타난 강적의 힘에 교미 중에 있던 수컷이 떨어져 나왔다. 밀려난 수컷은 몇 번이고 강적에게 덤벼들다가 슬그머니 물러선다. 이윽고 싸움에서 이긴 수컷이 암컷 몸에 달라붙는다. 언제 그랬냐 싶게, 아니 마치 힘센 자를 기다렸다는 듯이 암컷은 앙큼하게 새로운 수컷을 받아들여 교미에 돌입한다.
그걸 지켜보던 수컷이 다시 한 번 기어와 도전한다. 그러나 상대는 꿈쩍 않는다. 그래도 몇 번인가 강적의 다리를 잡아당겨 보더니 아예 콩잎 줄기를 타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나도 그만 일어섰다.
일어서다가 발밑을 내려다 본다. 교미를 하고 있는 방아깨비들이 한둘이 아니다. 연둣빛으로 맛있게 크는 무순이 이들 방아깨비들의 내밀한 교미 장소다. 허리를 숙이고 보니 풀메뚜기도 교미 중에 있고, 사마귀란 놈도 엉큼하게 그 짓을 하고 있다. 모두들 큼직한 암컷 위에 작은 수컷이 올라타 있다.
유충일 때는 암수의 크기가 같다. 그러나 차츰 성충이 되어 가면서 암컷은 몸이 커지고, 수컷은 커지는 대신 암컷을 그러잡는 악력이 강해진다. 암컷의 몸이 커진다는 것은 동시에 생식기가 커진다는 뜻이며, 악력이 강해진다는 건 자신의 유전자를 심을 암컷을 붙잡고 놓치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렇듯 곤충은 점차 성충이 되어가면서 교미하기 쉬운 몸으로 발육한다.
빈 그릇과 호미를 챙겨들고 앞마당으로 나왔다.
마당가 단풍나무 마른 가지 끝에 교미 중인 왕잠자리가 날아와 앉아 있다.
두상이 크고 몸이 초록인 왕잠자리의 교미 체형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유연한 곡선 체형으로 결합되어 있다. 그러니까 수컷은 꼬리를 다이내믹하게 위로 올려 암컷의 뒷덜미를 갈고리로 걸어잡고, 암컷은 다리로 수컷의 꼬리를 잡으면서 동시에 몸을 안으로 구부려 꽁지 끝에 있는 성기를 배에 위치한 수컷의 성기에 삽입하여 정자를 받는다. 뉘여 놓은 8자 모양이다. 볼수록 하늘이 주신 유연하고도 우아한 교미 체위다.
더욱 신비한 것은 이 두 마리의 머리 위치가 모두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교미를 하면서 같은 방향으로 날아다닐 수 있는 일이 가능해진다. 하긴 이들 잠자리는 백악기 때부터 지금까지 생존하는 자들이다. 독수리만한 잠자리가 지금의 작고 날렵하고 기하학적인 모습으로 진화한 데에는 환경에 잘 적응하는 탁월한 능력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렇고 보면 교미의 체형마저도 세상 그 어떤 종의 체형보다 세련되고도 모던하게 진화했을 것은 자명하다.
한 발짝 다가가자, 왕잠자리가 훌쩍 날아오른다.
교미를 하면서도 태연히 푸른 하늘을 날 수 있다니!
부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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