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취학통지서
권영상
12월이면 초등학교 취학 통지서가 나오는 모양입니다. 서울시가 보내주는 홍보 메일에 초등학교 취학에 관한 소식이 들어있습니다. 내년도 서울시 초등학교 취학 아동이 8만여 명. 2007년 1월 1일에서 같은 해 12월 31일 사이에 태어난 아동이 여기에 해당된답니다.
세상 때 묻은 어른들 이야기만 듣다가 7살 아이들에 관한 뉴스라니요! 반갑기만 합니다. 아니 좀 신선하군요. 큰 소리 안 내는 어린 아이들에 관한 뉴스도 세상이 취급하는구나, 그런 생각으로 관심있게 읽었습니다. 홍보 메일에 의하면 서울시에 한해서 초등학교 취학통지서를 인터넷으로 발급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내게는 지금 초등학교에 들어갈 아들이 없습니다. 물론 손자가 있을 나이도 아닙니다. 그러니 초등학교 취학이란 먼 남의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옷가슴에 코 닦을 손수건 달고 어머니 손잡고 가던 아련한 그리움 같은 게 있네요. 마치 그 시절의 소풍 추억 같은.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는 인터넷이 없었으니 동사무소에서 사람이 직접 통지서를 가져와 부모님께 드렸을 겁니다. 아니, 그 무렵에 초등학교 취학통지서라는 게 있기나 했을까요.
그때가 6.25 전쟁 뒤입니다. 그러니 통지서보다는 코흘리개 손을 잡고 가 학교와 직접 상대했겠지요. 아니면 3월 입학식에 다짜고짜 아이를 데리고 가 막무가내 식으로 1학년 줄에 세웠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생각이 옳을 것도 같네요. 전란 뒤라 누구나 제때에 자식을 학교에 집어넣을 겨를이 없었을 것 같습니다. 거기다가 행정의 말단 조직인 동사무소조차 취학 아동을 파악할만한 서류가 없었겠지요. 그러니 대충 초등학교에 다닐만한가 아닌가를 부모가 눈대중으로 판단하여 보냈을 것 같습니다. 눈대중이 정확하다 해도 집안 형편이 안 좋으면 좀 나아질 때까지 눈 딱 감고 기다렸을 것도 같네요.
그런데 암만 생각해도 우리 부모님은 나에 대한 눈대중을 잘못하신 것 같습니다. 나는 어쩐 일인지 6살에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였습니다. 아시다시피 만 6세에 초등학교 입학이 허용된 건 그리 오래지 않습니다. 요즘 아이들의 학습 능력이 충분히 향상되었다고 판단되었기에 취학연령이 내려간 거지요.
그럼, 그 시절 난 어떻게 6살 나이에 초등학교에 입학하였을까요? 나도 모르겠습니다. 그저 입학 시즌에 영문도 모른 채 어머니 손에 잡혀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새끼 염소 한 마리를 살 때처럼 어머니 손에서 나를 떼어내어 이것저것 눈대중해 보았겠지요. 먼 길을 걸어 다닐 만큼 다리는 튼튼한지 다리통을 꾹꾹 눌러 보고, 머릿속에 뭐가 좀 들었는지 밤톨로 내 머리통을 통통통 두드려도 보았을 것입니다. 찰싹, 뺨을 맞아도 잘 견뎌낼지 내 볼태기살을 집어 쭉 잡아당겨도 보았겠지요. 귓바퀴도 잡아당겨 보았을 거고, 괜히 뱃구레도 한번 교편으로 꾹 찔러보고는 소리쳤겠지요.
"염소 한 마리!”
아니네요. 합격! 이렇게 외쳤겠지요.
그렇게 해서 나는 1학년이 된 게 아닐까요.
1학년이 되어서 어느 날 선생님이 나이 조사를 하였습니다.
“일곱 살인 사람 손 들어 봐요.”
그러고는 손 든 사람의 머릿수를 세었지요.
“손 내리고. 다음은 여덟 살 손들어 봐요.”
이런 식으로 “아홉 살?”, “열 살?” 그러고도 머릿수가 안 맞아 그런지 “열 살 보다 나이 많은 사람?” 하였습니다. 그러자 우리 중에 누가 손을 들었습니다.
“손 다 들었지?”
선생님은 나이 조사를 마치고 교실을 휑 나갔습니다.
어린 나는 하루 종일 애가 말랐습니다. 선생님은 내 머리를 세어가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내 나이는 묻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나는 선생님 수첩에 몇 살로 적혀있을까요. 7살일까요, 8살일까요. 아니면 10살 보다 많은 그 이상의 나이로 적혀있을까요.
어떻든 나는 울면서 학교에 다녔습니다.
학교 다니는 일이 너무 너무 재미있어서 운 게 아니라 걸어서 학교를 오가는 일이 힘들어 울었습니다. 초등학교는 우리가 사는 마을엔 없었습니다. 큰 논벌을 가로질러 가야 하는 이웃마을에 있었습니다. 10여 리 길이었지요. 도중엔 늙은 소나무숲길도 있고, 그 길 으슥한 곳엔 소름돋는 곳집도 있었지요. 그리고 대관령 바람이 사철 내리치는 길고긴 논벌이 있었습니다.
부모님의 나에 대한 눈대중은 틀렸습니다. 물론 선생님 눈대중도 틀렸지요. 체격은 몰라도 걸어 다닐 체력이 부족했고, 정서적인 수준이 낮아 참지 못하고 툭 하면 울었습니다.
“이렇게 어린 걸 왜 학교 보내가지고.”
제일 먼저 투덜댄 사람은 내가 아니고 손 위 누님이었습니다. 누님은 나보다 다섯 살 위인데 걷기 힘들어 우는 나를 노상 업고 다녔지요. 누님의 책 보따리도 무거울 텐데 나까지 업고 다녔으니 그 고역이 이루 형언할 수 없었겠지요.
그러나 정작 본인인 나는 내게 닥친 이 운명을 탓하고말고 할 나이가 못 되었습니다.
언제 누님이 왜 젖비린내 나는 동생을 학교에 보내 저에게 고통을 주냐고 어머니한테 따졌습니다.
“학교 가는 게 보고 싶어 그랬지.”
어머니가 너는 아냐는 식으로 대답했습니다.
“우리도 학교 다니는데......”
그러자 어머니가 목소리를 낮추어 대답했지요.
“느덜이야......”
하여튼 나는 ‘느덜’이 아니라는 이유로 일찍 초등학교에 들어간 겁니다.
내 위로 누님이 세 분 있었으니 부모님 마음을 전혀 이해 못 할 일은 아닌 듯합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어린 나는 나보다 머리가 굵은 아이들과 학교생활을 잘 못 했습니다. 특히 존재감의 위축을 느꼈습니다. 축구를 해도 두 팀 22명 속에 끼이지 못했고, 달리기를 해도 늘 꼴지였지요. 체육 시간에 개울에 나가 수영을 해도 나는 늘 뒤에 쳐졌습니다. 그 땐 또 나이 먹은 애들이 종종 싸움을 시켰습니다. 증오심이 부족한 나는 멀쩡한 친구의 콧잔등을 때릴 수 없어 늘 코피를 흘리며 다녔습니다.
물론 교실 안에서도 나의 존재감은 희미했습니다. 학교 공부에 관심을 쓸 수 없는 형편의 아이들 덕분에 나는 그저 간신히 중간이나 했지요.
그렇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갔을 때입니다.
1학년 담임선생님이 어느 날 나를 불렀습니다.
“대체 나이가 몇이냐?”
대관절 내게 그것을 따져물었지요.
내가 써낸 생년월일과 호적초본이 다르다는 겁니다. 그러며 선생님이 내게 호적초본을 내보였습니다. 그건 누가 떼어다 낸 것일까요. 그걸 보고 나는 또 한 번 놀랐습니다. 거기엔 내 나이가 내가 알고 있는 나이보다 한 살 적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생일도 틀리고요.
정말 웃겨도 너무 웃기는 일 아닌가요?
그럼, 나는 도대체 몇 살에 초등학교에 들어갔다는 이야기입니까. 그러니까 법적으로 한다면 나는 5살에 초등학교에 들어간 것입니다. 학습 능력이 뛰어나기로 한다면 너무나 골치 아플 만큼 뛰어난 아이가 됨 셈입니다.
나는 인터넷에 떠도는 입학통지서 양식이 궁금했습니다.
거기엔 입학대상아동의 성명과 주민등록번호와 주소를 쓰는 난이 있고, 보호자의 성명, 관계, 주소, 전화번호가 적혀있었습니다.
그 무렵엔 주민등록번호가 없었을 테니 생년월일을 적었을 겁니다. 아버지는 그때 내 생년월일을 대체 어떻게 적으셨던 걸까요. 생년월일이고 뭐고 없이 그냥 눈대중으로 키가 이만하면 학교에 다닐 수 있겠다 싶어 입학을 시키셨던 걸까요. 종이 한 장 없이 잡고 간 내 손을 마치 염소를 사겠다는 이에게 염소 고삐를 쥐어주듯 선생님에게 넘겨주신 건 아닐까요.
지금 생각하니 어머니는 글을 읽고 쓰셨지만 아버지는 글을 모르셨습니다. 을사늑약을 전후하여 태어나셨으니 학문의 세례가 없었던 거지요. 아무리 생각해도 문맹이신 아버지께서 나를 눈대중으로 학교에 보내신 듯합니다.
하긴 전란 뒤였으니 정상적인 일이 어디 있었을까요. 그러니 아버지의 눈대중식 취학 방식도 먹혀들었을 것도 같습니다.
내가 눈대중 식으로 초등학교 입학을 해서 그런가요?
나는 지금도 눈대중에 밝습니다. 크기와 부피를 대중하는데도 그렇고, 사람을 보는데도 그렇습니다. 눈대중으로 선택한 아내도 한 치의 어김이 없습니다. 집을 고를 때도 정확한 정보보다 그저 눈대중을 더 선호합니다. 그래서 늘 손해를 봅니다만 또 손해를 보면서 살아보면 그게 이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직장을 그만둘 때도 눈대중인 감으로 사직서를 냈습니다. 삶도 눈대중으로 적당한 때에 마감할 수 있기를 벼르고 있습니다.
서울시가 보낸 초등학교 입학통지서 홍보 메일을 읽으려니 아득한 옛날의 일이 이렇게 떠오르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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