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한 그리움의 통로
권영상
몇 년 전인가 신문에서 읽은 기사 한 토막이 어렴풋하게 떠오릅니다.
6,25 전쟁 중에 북이 가까운 서해의 어느 섬에서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배를 타고 내려온 북한군이 마을의 남자들을 강제로 북송해갔습니다. 그들 중엔 결혼한 지 며칠 안 된 남자도 있었습니다. 남자는 그들이 타고 온 배에 오르며 울부짖는 아내를 위로했습니다.
“곧 돌아올 테니 걱정 말고 기다려요.”
사내는 그 말을 두고 빤히 보이는 북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럴 때에 이쪽의 아내는 곧 돌아 오리라며 잡혀간 남편을 60여 년 동안 기다렸습니다. 그 동안 남들 다 집을 개수할 때도 혹시나 남편이 찾아올까봐 불편해도 옛날의 그 집에서 그대로 살았습니다. 남들 다 집을 팔고 육지에 나가 편하게 살 때에도 혹시나 하여 불편해도 그냥 그 옛집에서 살았답니다.
옛날의 그 ‘젊은 아내’는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위해 집을 지키다가 이제는 다 늙은 할머니가 되었습니다. 그녀에게 있어 인생이란 그 전부가 송두리째 눈물에 젖은 기다림이었습니다. ‘젊은 아내’는 그 긴 기다림을 견뎌내기 위해 얼마나 울고, 또 얼마나 가슴 졸였을까요. 지금도 그녀는 남편과의 해후를 꿈꾸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만난다고 하지만 60년 세월을 홀로 보낸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기억할 수 없습니다. 그때 남겨두고 간 유복자 아들도 남편에겐 낯선 아들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그녀의 남편이 그 ‘젊은 아내’와 공유할 수 있는 기억은 오직 하나, 집뿐이겠지요.
할머니가 된 젊은 아내가 집에 집착하는 이유가 그 때문일 테지요. 집은 그녀에게 남편을 기다리는 유일한 통로가 아니겠습니까. 그러기에 서로는 그 집을 가슴에 품고 서로 그리워하며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게는 나보다 스무 살이나 많은 형님이 있었습니다.
이미 오래 전에 돌아가신 형님 이야기입니다. 일찍 상처를 한 형님에겐 재혼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이목구비가 또렷한 도회지 여자였습니다. 말씨도 구더분한 시골말과는 달랐습니다. 시골에 내려와 살아도 머리만큼은 꼭 퍼머넌트 머리를 했습니다. 옷도 시골사람과는 영 다른 모던 풍의 옷을 입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녀가 얼굴에 분이나 바르고, 읍내나 오르내리는 여자는 아니었습니다. 사리에 밝고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아궁이 앞에 앉아 소죽도 끓였고, 여자가 해야 할 집 바깥의 일도 도왔습니다. 반듯했지만 소탈했고, 또 이야기 기술도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때에 형님은 여자를 데리고 번화한 항구도시에 나가 잡화가게를 냈습니다. 장사가 잘 된다는 이야기도 들렸고, 곧 망쳐먹을 만큼 사정이 어렵다는 이야기도 들렸습니다. 사정이 어렵다는 이야기가 들려올 즈음 형님은 종종 집을 찾아와 전답을 팔자며 아버지와 실랑이를 여러 차례 벌였습니다.
“여자의 농간일 테지.”
우리 집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그랬습니다.
오랜 실랑이 끝으로 결국 여자는 형님 곁을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오랜 뒤, 형님은 사실만큼 사시다가 그만 저 세상으로 가버렸습니다.
나는 형님 가버린 고향집이 그리울 때면 휴일의 시간을 내어 고향집을 찾곤 했습니다.
그때도 고향을 찾아간 어느 늦은 봄이었습니다.
마을 동사무소 가까이에 있는 작은 잡화점에서 사탕 한 봉지를 사들고 나올 때입니다. 길 건너편 식당 앞을 지나가는 한 여자가 얼핏 눈에 들어왔습니다.
“혀, 형수님!”
나는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이 그 여자를 소리쳐 불렀습니다.
그분이었습니다. 아무리 여자가 떠나간 지 20여 년이 지났다 해도 우리 집에 와 5,6년을 살다 가신 그 분을 모를 리 없습니다. 나는 사탕봉지를 손에 들고 길을 건넜습니다. 여자의 퍼머넌트 머리 모습이 먼데서 보아도 그때의 모습과 너무나 닮았습니다.
그때에 읍내로 가는 시내버스가 왔고, 버스가 떠난 뒷자리엔 아무도 없었습니다. 나는 먼지를 일으키며 떠나가는 버스를 바라보았습니다.
버스 소리에 내 말을 못 들은 건지. 아니면 ‘형수님’이란 말을 잊고 산 지 너무 오래 되어 그런지, 그도 아니면 내가 사람을 잘 못 본 건 지.......
나는 혼자 고향집으로 걸어가며 버스를 타고 떠나간 여자를 생각했습니다.
여기엔 왜 왔을까. 혹시 우리 집이 바라보이는 솔밭머리에서 우리 집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간 건 아닐까. 읍내로 나갈 땐 그 솔밭 언덕을 걸어 올라야 하고, 다시 돌아올 때도 그 솔밭 언덕을 지나 긴 들판 사이로 난 길을 걸어와야 했습니다. 비록 재가해온 집이어도, 비록 전답 문제로 실랑이를 했던 집이어도 형님과 함께 몸을 부대끼며 살았던 곳이 그 집입니다. 그러니 살다보면 그 집에 대한 기억이 불현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을 테지요.
나는 솔밭머리까지 걸어와 우리 집이 잘 보이는 소나무 언덕에 섰습니다. 몇 안 되는 우리 마을 집들이 저쪽 감자밭 들판 너머에 보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던 커다란 슬레이트집, 집 마당에 선 크고 푸른 오동나무, 잠깐만 서 있어도 오고가는 사람이 보이는 열린 마당........
혹시 여자는 여기에서 형님을 기다리다 돌아가는 길이 아니었을까. 아니, 여자는 형님이 돌아가신 걸 아직도 모르고 이렇게 찾아오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려니 인생이란 게 얼마나 서럽도록 목마르고 그리운 것인지.
편지를 부쳐볼 수도 없고, 전화를 해 볼 수도 없는. 그렇다고 얼굴을 마주하거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기도 민망한. 그러면서도 그때의 그 집에 대한 기억이 아련한.
불현 책상 위에 둔 휴대폰에 문자메시지가 들어왔습니다.
“제 전화번호가 이번에 010-****-****로 변경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고향 친구한테서 온 문자였습니다. 나는 반가워 그에게 얼른 전화를 했습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안 바꾸리라 했는데…….”
친구가 010 통합식별번호 정책을 정색을 하며 비난합니다. 그건 또 왜? 하고 내가 물었습니다. 내 애인같이 정 든 것이니까, 그러면서 뭔가 하나로 통일하는 이런 정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목소리를 높이더니 그만 전화를 끊었습니다.
정부가 휴대전화의 앞자리번호인 이동통신사 번호를 이달 말까지 010으로 통합하고 내년부터 다른 통신사번호엔 음성통화와 문자발신 서비스를 하지 않겠답니다. 개인 프라이버시 보호와 010으로 통합될 때 앞자리번호를 누르는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다는 편의성을 통합 이유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011, 016, 017, 108, 109를 쓰고 있는 가입자들이 전국적으로 115만 6000여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들은 또 그들만의 이해득실이 있어 그 통신사 전화번호를 가지고 있겠지요. 사용하는 데 아무 불편도 없으니 전화번호를 바꿀 이유도 물론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이런 얼토당토 않는 상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혹시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전화번호를 바꾸어선 안 될 사정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 말이지요. 백령도의, 이미 할머니가 된 여인이나 내 형님의 이별한 여인처럼 누군가를 몹시 기다려야 하는 사연이 혹 있는 건 아닐까요. 이렇게 전화번호를 바꾸면 이제 이승에선 다시 만날 수 없는 그런 아픈 단절 때문에 고뇌하는 이는 없을까요. 괜히 그런 생각이 자꾸 드는 건 웬일일까요.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만이 어찌 그 사람의 인생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겉으로 유유한 척 해 보여도 그의 보이지 않는 깊은 내면엔 드러내선 안 될 아픈 인생이 또 있을 수도 있겠지요. 나라고 어찌 내 주변 사람들이 보는 그것만이 나이겠습니까.
고양이가 사람 눈에 고양이로 보이거나 때로 실뭉치로 보이는 것처럼 누군가의 눈엔 내가 그저 알려진 나로도 보이겠지만 실뭉치로도 보일 수도 있을 테지요. 그런 점에서 때로 그 115만 명의 어떤 이들 중엔 아련한 기다림이 있어 전화번호를 바꾸지 못한 채 여태껏 살아온 이도 있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제 누구나 다 전화번호를 바꾸어야 한다면 그 때문에 허전해질 사람의 가슴은 또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요. 그게 그 누군가를 향한 유일한 그리움의 통로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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