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한 그 여름의 경주여행
권영상
지금 생각해도 그 때 그 여행은 좀 잔인했다. 그걸 여행이라고 해도 될까. 고행이거나, 아니면 고역이거나, 아니면 혹사의 댓가거나.
여행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여름방학을 얻어 도배를 하려고 했다. 이사온 지 7,8년 되고 보니 벽지가 많이 낡았다. 몇 군데 도배집에다 전화를 했다. 생각보다 도배라는 게 그리 간단한 게 아니었다. 도배 비용도 비용이지만 세간이 문제였다. 세간살이를 꺼내주지 않으면 도배가 어렵다는 거였다. 그러니까 세간살이를 별도의 창고에 완전히 옮겨 집을 비워달라는 거였다. 또 한 번의 이사를 가는 셈이었다. 그저 간단히 하루 이틀 집만 비워주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집을 팔고 이사를 가는 편이 나았다. 알았다, 하고 전화를 끊었지만 그러고 말기도 뭣했다. 한번 도배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당시만 해도 새파랗던 나는 아내와 이제 초등학교 5학년인 딸아이에게 의향을 물었다.
우리가 도배를 하자. 그러고 그 비용으로 여행을 가자고.
아내는 내 말에 기함을 했지만 딸아이는 달랐다. 도배가 뭔지 모르는 딸아이는 아빠하는 일이라면 따르겠다고 했다. 그러나 정작 딸아이의 욕심은 여행에 가 있었다. 기차 여행을 한번 해 보고 싶다는 거였다. 기차 여행은 나도 처음이었다.
힘들게 아내의 허락을 받아낸 나는 다음날부터 벽지를 떼었다. 과거 어렸을 때 고향집에서 누나랑 벽지를 붙여본 어렴풋한 경험, 그게 문제였다. 그게 만용을 불렀다면 불렀다. 벽지를 떼면서도 나는 하루면 거실쯤은 거뜬히 붙일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나의 믿음을 본 딸아이는 내 일에 적극적이었다.
우리는 일을 하면서 새마을호를 타고 부산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산과 들과 강변. 열차의 좁은 통로에서 사 먹는 삶은 달걀과 양갱과 맥주. 그리고 열차 식당에서 창밖의 노을을 바라보며 하는 저녁식사와 늦은 밤, 별을 보며 마시는 맥주와 음료. 오륙도와 부산항, 자갈치 시장과 용두산 공원, 낙동강 하류와 그 갈대밭…
그런 설레임을 가지고 부지런히 벽지를 떼었다. 아침부터 시작한 일이 해가 질 때까지도 끝나지 않았다. 도배업소에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쪽 대답은 한결 같았다. 세간살이를 옮겨주지 않으면 어렵다는 거였다. 만용을 뒤늦게 후회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벽지를 사 가지고 와 재단을 했다. 딸아이는 풀칠을 하고 아내와 나는 의자에 올라서서 벽지를 맞추어 붙였다. 예전 , 누나와 벽지 바르던 그 순서 그대로 벽지를 붙여 나갔다. 사흘이 지난 뒤에야 거실과 딸아이 방 도배가 끝났다. 그때, 우리는 완전히 지쳐있었다.
“아빠, 부산 보다 경주가 어때? 교과서에도 나오는 데.”
우리는 다시 경주로 여정을 바꾸었다. 부모에게 있어 ‘교과서’라는 게 얼마나 거역할 수 없는 말인가. 그 시절, 우리는 딸아이의 공부와 관련되는 일이라면 벌벌 떨었다. 열차표와 숙소를 예매하고 난 뒤 배낭을 꾸렸다. 여행경비는 넉넉했다. 넉넉하다 못해 넘쳤다.
경주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잔혹한 노동 끝에 얻은 결과였다. 2박 3일. 석굴암, 칠불암, 황룡사지, 석남사터까지 걸었다. 허리와 어깨에 파스를 붙여가면서. 그건 정말 아비로서 못할 잔인한 여행이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그 기차 여행이 오래도록 남는다. 학생인 딸아이에게 제대로된 ‘일’을 시켜본 것도 그때가 마지막인 듯하다. 누가 시켜서 그렇게 하라면 그렇게 할까. 촌놈이 아니고서야 어디서 그런 만용이 나올까.
(교차로신문 2009년 7월 3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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