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그 아련한 감자서리
권영상
주말농장에서 심은 감자를 캤다.
주말농장이란게 겨우 땅 5평 정도다. 그러니 감자를 캤다 해봐야 감자씨 열여덟 개를 놓은 게 전부다. 그래도 날씨가 순조로운 탓에 잘 자라주었다. 꼭 날씨가 순조로운 탓만도 아니다. 그거 심어놓고 무슨 큰농사나 짓는다고 주말마다 달려가 물 주고, 김매고, 북 주고 그랬다. 정말이지 자식 키우듯 홀홀 불며 키운 덕이다. 아직 감자 캘 때가 아니다. 보통 한여름 더위가 정점을 치달을 때 캐던 경험이 있다. 그런데도 기상예보가 장마 타령을 하기에 호미를 댔다. 실은 감자가 얼마나 컸을까, 그것도 무척 궁금했다.
어렸을 때 꽃씨를 뿌리면 다음날 아침부터 꽃밭에 나가 앉았다. 그러다 끝내는 못 참고 심은 씨앗을 파헤치던 추억이 있었다. 아마 그런 못된 기억 때문일지도 모른다. 서울이란 데를 올라와 내 손으로 감자를 심었다는 건 대견스러워도 보통 대견스런 일이 아니다. 시골에서 캐던 주먹만한 감자는 아니어도 캐고 보니 제법 알이 굵었다. 그걸 한 상자 싣고 집으로 돌아오려니 예전 어릴 적 감자서리가 생각났다.
감자가 여물 적이면 어린 우리들은 소를 몰고 갯가로 나갔다. 집 뒤에는 경포호수가 있었다. 거기엔 소먹이기에 좋은 갯벌이 있었다. 넓은 벌에는 풀이 지천이었다. 갈대, 억새, 줄, 부들, 소루쟁이, 토끼풀, 바랭이, 고치풀, 달개비, 댕댕이덩굴 하며 없는 풀 없이 흔했다. 몰고 간 소의 고삐를 목둘레에다 둘레둘레 감아놓고,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철썩 때리면 소는 거칠 것 없는 그 넓은 갯벌을 종일토록 휘돌아 다녔다. 그렇게 소 먹이러 오는 애들은 나 말고도 여럿이었다. 소를 풀어놓고 나면 우리는 자유로웠다. 우리를 간섭하는 사람이라곤 없었다.
공부를 싫어했던 우리들에게 갯가는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우리들은 갯가 버들 그늘에 누워 호수에 어리는 길고 긴 대관령을 마음껏 봤다. 하늘벽보다 더 높은, 언제나 머리에 흰구름을 얹고 있는 대관령은 조용한 오후가 되면 호숫물에 텀벙, 내려와 쉬었다. 볕 좋은 날이면 대관령뿐 아니라 호수 주변의 나무들이며 민가며 경포대의 현판글씨까지 선명히 물위에 어렸다.
그 무렵이다.
누구의 제안이랄 것도 없이 우리들은 감자 서리를 했다. 이미 정해진 일처럼 몇몇은 한창 여물어가는 햇감자를 서리하러 가고, 또 몇몇은 감자를 구울 마른 나무조각을 주웠다. 나무를 주워와 불을 피울 때쯤이면 감자 서리를 갔던 애들은 웃옷 앞섶에 하얗고 예쁜 어린 감자를 파가지고 돌아왔다. 불이 한창 오를 때면 불속에 감자를 묻었다.
그러고 난 뒤 불이 삭을 때쯤이면 불 위에 마른 흙을 덮었다. 그러고는 모두들 갯물에 뛰어들었다. 수영복이 없던 시골 애들이었으니 발가벗은 채로 풍덩풍덩 달려들었다. 대여섯 명 애들의 수영이란 게 여간 호들갑스럽지 않다. 호수가이 떠나가라 텀벙댄다. 그러면 잉어들이 놀라 우리들 가랑이 사이를 빠져 달아났다. 잉어를 쫓고 쫓으며 헤엄을 치다 갯가로 다시 돌아와 보면 감자를 묻어둔 흙은 벌써 하얗게 말랐다. 우리들은 침을 삼키며 꼬챙이로 흙을 헤쳐 잘 익은 감자톨을 집어내어 벗겨먹었다.
주둥이에 숯검정을 해가지고 놀다 보면 갯벌에도 어둠이 내린다. 흩어져 풀을 뜯던 소들은 누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우리들 주변으로 어슬렁어슬렁 모여들었다. 발 끝에 채이는 이슬을 털며 집으로 돌아올 때면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다들 마음이 차분해져 있곤 했다. 나는 집에 오는 대로 감자 몇 개를 씻어 가스오븐에 구웠다. 예전 호숫가 갯벌에서 먹던 그 운치는 없어도 구운 감자 맛만은 변함이 없다.
(교차로신문 2009년 7월 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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