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 연재 칼럼

고향집, 그 여름날의 툇마루

권영상 2013. 6. 25. 08:44

 

 

 

고향집, 그 여름날의 툇마루

권영상 

  • 09.06.20 09:28:44
  • 추천 : 0
  • 조회: 1903
  •  

     

     

    고향 시골집엔 툇마루가 있었다.

    상추가 나고 풋고추에 약이 오를 때면 점심은 늘 툇마루에서 먹었다. 어머니와 누나는 안방에서 들었지만 아버지와 나는 툇마루에서 상을 받았다. 바깥일을 하시다가 어머니가 밥상 내오시는 것을 보면 아버지는 고추밭 풋고추를 한 주먹 따셨다. 그걸 마당가 펌프물에 슬렁슬렁 씻어서는 손을 내쳐 훅 물기를 빼어 상머리에 앉으셨다. 아버지가 따오신 고추는 약 오른 놈 네댓 개에 연한 놈 서너 개다. 약 오른 놈은 아버지 몫이고, 연한 놈은 나를 위해 그 한 순간에 아버지가 생각해 오신 거다.

     

     

    밥상에는 항상 고추장 종지가 있었다. 고추를 찍어 먹든 안 먹든 고추장도 반찬이었다. 아버지는 밥 한 술을 뜨시면 약오른 고추꼭지를 따서는 고추장을 꾹 찍어 잡수셨다. 방금 딴 고추라 아버지의 입에서는 와삭와삭 고추 부서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나는 그때마다 매운 느낌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보리가 많이 든 험한 밥을 쉽게 넘기는 데는 매운 고추와 고추장이 필요했다.


     

     

    초여름이면 툇마루에 상을 받고 앉아 상추쌈을 즐겨 먹었다. 상추는 오랍뜰 고추밭 이랑 여기저기서 자랐고, 고추밭 귀에는 마른 나뭇가지를 세워 따로 물오이를 키웠다. 물오이 냉국에 상추쌈은 사방이 꽉 막힌 방안에서 먹기보다 땡볕을 내려다보는, 엉덩이가 선선한 툇마루에서 먹는게 제격이다.

    밥을 먹다가도 마당을 지나가는 이가 있으면 아버지는 꼭 ‘이보게’ 하며 그를 불러 들였다. 그러면 그 분은 펌프물에 대충 손을 씻고 툇마루에 걸터앉아 몇 쌈 입에 넣고 갔다.

    툇마루는 방과 마당의 경계다. 그러나 어찌 보면 방의 구실도 하고 마당의 구실도 한다. 익은 고추나 올벼, 대추나 참깨, 콩 따위를 말릴 때에는 마당 구실을 한다.


     

     

    그런가 하면 방 구실도 한다.

    여름날이 더워지면 나는 곧잘 툇마루에서 잤다. 어머니는 한뎃잠을 말렸지만 나는 억지를 썼다.

    여름날의 시골 여섯자 방은 좁고 답답하다. 찜통이다. 마당에 모깃불을 피워놓고 툇마루 바닥에 덜렁 누워 잠들면 더운 몸이 쉬이 식는다.

    모기들 극성에 눈을 뜨면 푸슬푸슬 오르던 모깃불도 사그라든다. 밤도 깊고 세상도 조용하다. 그러나 그 야심할 때에도 잠들지 않고 어둠과 싸우는 놈들이 있다. 집앞 무논의 개구리들이다. 어린 벼포기에 숨어 울어대는 개구리 소리는 더없이 요란하다. 곽곽곽 우는 놈에 웍웍웍 우는 놈, 깨그락깨그락 우는 놈에 꺼그럭꺼그럭 우는 놈. 어떤 놈은 무슨 설움이 그리 큰지 끄억끄억 운다. 또 어떤 놈은, 울어도 배꼽 잡게 우는 놈이 있다. 방구방구방구 그러거나 고자고자고자 그러며 운다.

     

     

     

    울음소리에 온 마을이 들썩거린다. 그러나 그 울음바다 속에 따라 들어서면 시끄러움도 잊어버린 채 또 잠에 빠진다. 그렇게 든 잠을 누가 또 설핏 흔들어 깨운다. 놀라 눈을 뜨면 내 가슴을 밟고 올라와 나를 내려다 보는 달빛이 있다. 게으른 달이 이제야 솟아 외로이 누운 나를 흔든다. 이미 그쯤이면 극성스럽던 개구리 울음도 모기들도 잠에 빠지고 없다. 세상이 고요해진다.

     

     


    마룻장 틈새로 툇마루 밑을 흐르는 서늘한 바람만이 솟구친다. 장딴지와 팔뚝에 소름이 돋는다. 봉당에 몸을 구부려 자던 누렁개도 추운지 ‘컹’ 짖는다.‘안에 들어와 자거라.’ 어머니 마른 목소리가 들려온다. 홑이불을 걷어들고 일어선다. 발바닥에 밟히는 툇마루의 촉감이 차다.

     

     

     

    그 시절, 나는 잠을 설치면서도 여름이면 종종 툇마루에서 한뎃잠을 잤다. 그러나 그 좋던 툇마루도 고향집이 양옥으로 바뀌면서 없어졌다.

    개구리 울음도 모깃불도 고향집에서 없어진지 오래됐다. 

    (교차로신문)

     

     

     

     

     


     

    '오동나무 연재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잔인한 그 여름의 경주여행  (0) 2013.06.25
    어린 시절, 그 아련한 감자서리  (0) 2013.06.25
    레모네이드 사랑   (0) 2013.06.25
    여보, 보름달 떴어요   (0) 2013.06.25
    컴퓨터와 까치집  (0) 2013.0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