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모네이드 사랑
권영상
p형! 오늘은 말입니다. 퇴근길에 학교 근처 공원에 갔습니다. 제가 가끔 들르는 뎁니다. 이 거대한 도시 안에 이만한 공원이 있다는 게 참 과분할 정도입니다. 오솔길을 조용히 걷는데 너무도 우연하게 작년 우리 반 아이를 만났습니다. 숲 길 벤치에 앉아 있던 그 녀석이 나를 아주 반겼습니다.
중학교 2학년이니까 이제 14살 사내아이입니다. 두보라고 마음이 부드럽고 성격도 활달한 녀석이지요. 저는 기쁜 마음에 두보 곁으로 가 앉았습니다. 앉으며 보니 두보가 끼고 있는 반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내가 궁금하다는 듯 반지를 보자 ‘커플링에요’ 하면서 솔직히 말해줍디다. 요새 애들, 왕년의 담임이었다고 쭈볏거리거나 그러지 않아요. 만난 지 얼마나 됐냐고 물어봤어요. 애들의 또 다른 세계가 궁금했습니다. 단과학원에서 만났다는데 1년 8개월이나 됐답니다. 우연히 자판기에서 레모네이드를 마시다가 레모네이드 때문에 좋아하게 됐다는 거네요. 참 아름다운 만남이지요. 그치요? 레모네이드 사랑.
두보는 그 여자친구를 버찌라고 부릅디다.
버찌랑은 거의 매일 만나는 편이더군요. 평소엔 주로 학원에서 만나고 주말엔 주로 여기, 그러니까 지금 제가 두보랑 앉아 있는 이 벤치에서 만난답니다. 버찌가 즐겨 입는 옷을 물어봤어요. 작가로서 그런 일도 좀 궁금하잖아요. 두보는 진지하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제가 저의 옛 담임이라는 걸 분명히 의식하면서요.
"스키니즈를 즐겨 입어요. 주로 청스키니즈를요. 윗도리는 흰색 남방을 입는 걸 좋아하고, 신발은 청색 컨버스를 신어요. 머리요? 머리는 댕강머리요."
p형, 어때요? 흰 남방셔츠에 청스키니즈, 그리고 파란색 컨버스. 깔끔하고 귀여운 중학생 모습이지요? 미적 감각도 미적 감각이지만 여자 중학생으로서의 단정감이 있습니다.
"만나면 손을 잡니?"
그 말을 꼭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저도 아버지니까 터놓고 물었습니다. 요즘 중학생들이 어느 선에서 친구관계를 이어가고 있는지, 작가라면 내밀한 부분에도 관심이 갈 수밖에 없잖아요.
"만나면 당연히 손 잡아야 해요. 안 그러면 버찌한테 혼나니까요."
"키스도 해 봤니?"
나는 더욱 세게 물었습니다.
"딱 한 번 해 봤어요. 버찌가 눈감으래서 눈 감았더니 제 입술에다 했댔어요."
그렇게 말하는 두보 얼굴에 약간의 미소가 번졌습니다.
나는 얼른 말머리를 돌려 다투어본 적은 없냐고 물었습니다.
‘우리 헤어지자’
그런 문제메시지를 버찌가 받은 적이 있었답니다. 누군가 장난메시지를 보냈나봅니다. 그 일로 해서 버찌 마음이 풀리지 않아 9일간을 못 만났나 봐요. 서로 친구 사이라 해도 그런 장난엔 상처받나 봅니다. 학주한테 커플링 빼앗기고 그냥 갔을 때도 자기가 싫어 그러냐며 싸웠었나봐요. 그러면서 이들이 어른으로 성숙하고 성장해 가는 거겠지요?
근데 헤어지며 한번 더 물어본 게 있습니다. 버찌랑 사귀는게 공부에 방해가 되지는 않니?하고요. 직업병이지요? 쓸데없는 질문인 줄 알면서도 물었습니다. 전혀! 라고 합디다. 버찌가 수학을 잘하고 두보가 영어를 좀 하는 편이라 서로에게 큰 도움이 되나 봅니다.
p형, 늦깎기 결혼을 한 p형에게도 이제 중학생인 딸이 있댔지요?
제가 드린 이 편지가 따님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두보 만난게 행복입니다. 소년시절로 되돌아간 기분입니다. 레모네이드 향기처럼 좋은 친구로 잘 사귀라는 말을 꼭 해주었습니다.
(교차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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