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보름달 떴어요
권영상
아내가 또 세탁을 한다.
직장을 다니는 아내는 직장만으로도 벅차면서 밥과 세탁을 하루도 거르지 않는다. 할 수 없이 나도 거드는 집안 일이 있다. 베란다 화분을 돌보거나 세탁해 놓은 빨래를 널고 거두어 들이는 일이다. 근데 오늘은 저녁 세탁을 도울 여유가 없다. 밀린 일이 있어 수저를 놓는 대로 내 방에 들어왔다.
일 하나를 거의 마칠 무렵이다. 세탁이 다 된 옷을 꺼내어 거실로 가져가는 콩콩거리는 발소리가 들린다. 세탁기는 뒷 베란다에 있다. 그런 관계로 세탁물 운반이 불편하다. 나는 내 일을 하면서 거실에서 아내가 하고 있을 일을 짐작해 본다. 지금쯤은 건조대에 옷을 걸겠구나, 그러며 내 일에 몰두하고 있을 때다.
“여보! 달 떴어요!”
아내의 목소리가 앞베란다에서 날아왔다. 한창 피곤해 있을 시간인데 목청이 가볍다.
나는 하던 일을 두고 아내 곁으로 갔다. 아내가 가리키는 아카시아 숲 너머에 커다란 보름달이 둥두렷 떠올랐다. 정말 얼마나 오랜만에 보는 보름달인지, 늦은 봄 밤인데도 대낮처럼 후연하다.
나는 아내와 나란히 창에 기대어 들찔레 꽃 같이 환한 달을 쳐다보았다. 참, 달도 크지? 밝기도 하네. 쟁반 같다는 말이 옳아, 그치? 아내와 내가 주고 받은 말은 대략 그 정도였다. 놀랍게도 우리들 머리 위로 솟아오른 우주의 손님을 달리 어떻게 표현 할 길이 없다. 어쩜 그 정도의 대화가 당연할지 모르겠다. 자연이 온 몸으로 그 실체를 낱낱이 다 보여주는데 거기에 덧붙일 사람의 말이 또 뭐가 있겠는가.
마음씨 좋은 남정네의 술 취한 얼굴처럼 불콰한 달은 크기도 컸지만 우리 곁에 너무나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정말이지 손을 내밀면 내 손을 덥썩 잡아줄 듯이 가까웠다.
달은 눈에 보일 정도로 가만히 서쪽으로 움직이더니 한 뭉치 구름을 밀고 그 안으로 들어서고 말았다.
그 무렵이었다.
“이 향기 좀 봐요!”
이번에는 아내가 어둠을 향해 코를 벌름댔다.
“이 아카시아 향기 못 느껴요?”
그러고 보니 아카시아 향이 창 문턱까지 차올라 있었다.
지금이 오월, 아카시아 꽃이 한창 필 때다. 달 빛에 넋을 빼앗기는 동안 그만 창 밖에 가득한 꽃 향기를 놓치고 있었다. 바람 하나 없는 밤인데도 밤의 물결에 달고 진한 향기가 밀려왔다.
숨었던 달이 다시 빠끔히 구름을 열치고 나온다. 일순, 뽀얀 달 빛 한 자락이 목선처럼 다가온다. 달빛에 아카시아 향기가 가득히 배어있다. 향기로운 달빛이다. 마치 보름달 골짜기에 아카시아 꽃 향그럽게 핀 숲 하나 있는 듯 하다. 눈이 어리도록 환한 달 빛과 달 빛에 녹아버린 달콤한 아카시아 향기, 그리고 밤. 오월의 밤은 여느 때보다 향긋하다.
빨래를 다 널고난 아내는 창문을 닫지 않았다. 달빛이 너무 아깝다는 거였다. 이렇게 달콤하고도 풍요한 달빛을 도심에서 거저로 누린다는 게 놀랍다는 눈치다. 월급쟁이로 세상을 사는 우리의 고된 밤을 위해 우주의 누군가가 달 빛을 선물로 주신 거겠다.
거실에 들어와 전등을 끄고 누웠다. 몸을 움씰, 하기만 해도 아카시아 꽃 향내가 내 몸에서 풍긴다.
“야오오, 야오오옹.”
어디선가 밤 고양이가 운다. 저도 이 오월의 달 밤이 견딜 수 없나 보다.
(교차로신문 2009년 5월 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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