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 연재 칼럼

팥배나무가 짊어진 삶

권영상 2013. 6. 23. 21:52

 

 

 

 

 

팥배나무가 짊어진 삶

권영상

 

 

 

 

 

겨울이 지난 뒤의 산에 올라보면 산이 매우 수척하다. 겨울은 인간에게만 혹독한 게 아니라 수목에게도 마찬가지다. 수목이 목숨을 부지해 내는 일을 가로막는 가장 잔인한 것이 생로병사와 참혹한 겨울이다.
며칠 전 가까운 산을 오르다 본 것이 있다. 비탈에 선 커다란 아카시아나무가 풀리는 봄기운에 겨워 쓰러졌다. 쓰러지면서 근방에 서 있는 팥배나무에 얹히고 말았다. 팥배나무는 아카시아나무의 무게에 견디지 못하고 땅에 닿도록 몸을 구부리고 있었다. 그걸 가만히 보고 있자니 마음이 무거웠다. 줄기며 가지들이 모두 땅을 향한 채 간신히 몸을 버팅기고 있는 팥배나무가 측은했다. 생각 같으면 아카시아나무를 들어올려 팥배나무의 고통을 줄여주고 싶었지만 그건 내 힘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팥배나무는 어쩌면 아카시아나무가 수명을 다할 때까지 그냥 그대로 사는 길밖에 없어 보였다. 아카시아나무가 그에게 짐이 된 것만은 분명했다. 제가 살기 위해서도, 아카시아나무를 살리기 위해서도 팥배나무는 이제 쓰러질 수 없다. 새들이 와 노래해 준대도 사는 동안 그 노래를 옳게 듣지 못할 거고, 햇볕이 아름답다 해도, 바람이 시원하다 해도 그걸 행복하게 누리며 살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짊어진 짐에 대한 생각을 바꾸기 전에는….

 

고향엔 홀아비가 된 형님이 계셨다. 형님은 어쩌다 그만 너무도 이른 나이에 형수님을 잃었다. 형님에겐 여럿의 자식들이 있었지만 형님 힘으로 키우고 가르치기엔 힘들었다. 몇 차례 새 형수님을 맞았지만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그 고통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본 분은 어머니셨다. 지병으로 당신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 어머니에게 형님의 일은 이제 어머니의 무거운 짐이 되고 말았다. 어머니는 그 지난한 짐을 지고 살아내셔서 그랬을까. 조카들 출가를 다 시키고 난 뒤 아흔 여섯 되시던 해에 돌아가셨다. 온몸을 짓누르는 그 짐이 없었다면 그렇게 오래 사시기 힘드셨을 것이다. 어머니는 그 짐을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이셨을까. 그 일을 단지 고통스럽고 한탄스러운 부담으로 받아들이셨다면 그리 오래 사셨을까.


 

“너희들이 그 동안 고마웠다.”
어머니는 매우 맑은 정신으로 떠나셨다. 그 무렵 조카들 앞에서 그런 말을 여러 차례 하셨다. 고맙다는 말 속엔 무슨 뜻이 숨어있을까. 조카들이 흠없이 잘 커주어서 고맙다는 말씀이겠지. 그러고 보면 당신 앞에 닥친 고통을 운명처럼 받아들인 게 아닌가 한다.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다들 바르게 커주기를 염원했다는 뜻이겠다.

 


사람은 무슨 힘으로 사는가. 가끔 그런 생각에 빠질 때가 있다. 사람들 중에는 아무 어려움없이 일생을 평탄하게 사는 이도 있고, 등에 지워진 버거운 짐의 무게로 사는 이도 있다. 이만큼 살수록 인생이란 내 것만의 것이 아니다는 생각이다. 내 것만의 짐을 가지고는 그렇게 긴 인생을 살 수 없을 테다. 나의 것뿐 아니라 부모와 자식들, 형제와 이웃들에 의해 지워진, 피할 수 없는 짐의 무게로 살아가는 게 아닌가 한다.


이 글을 마치면 팥배나무를 만나러 가야겠다. 그를 찾아가 그가 짊어진 고통을 잠시나마 곁에서 지켜봐 주어야겠다. 앞으로 5년이 될지, 10년이 될지 그 먼 날 동안 팥배나무는 아카시아나무라는 짐을 짊어지고 살아야한다. 그를 위로해주고 와야 내 마음이 편해질 것 같다.

(교차로신문 3월 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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