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 연재 칼럼

외로움을 타는 이들

권영상 2013. 6. 19. 17:15

 

 

외로움을 타는 이들

권영상

 

 

 

 

마음이 답답해 산에 오를 때가 있다.

산이라 봐야 동네 산이지만 산에 오르면 그 때만큼은 세상 뒤숭숭한 일을 멀리할 수 있어 좋다. 솔바람 소리가 좋고, 골짜기 물 소리가 좋고, 쯔빗쯔빗 박새 울음소리가 좋다. 산이 들려주는 깨끗한 소리에 이끌려 산을 찾는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세상의 소음으로부터 귀를 쉬게 하고 싶은 마음 때문일 거다.

그런 욕심으로 편한 길보다 호젓한 길을 걷고 있을 때다. 길 맞은 편에서 라디오 소리가 났다. 등산복을 챙겨입은 남자다. 그의 가슴주머니에서 남녀 진행자의 수다가 한껏 흘러나오고 있었다. 남자는 라디오를 들으며 무심히 내 곁을 지나쳤다.

 

이 호젓한 산 속까지 왜 라디오를 가지고 다닐까.

나는 흘끔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말끔한 마흔 후반의 남자다. 라디오를 켜고 다닌다는 일만으로 나는 그를 생각없는 사람으로 치부했다. 그저 그렇고 그런, 잡다한 소음에 매여사는 사람쯤으로.

그런데 산중턱에서 라디오를 들으며 오는 이를 또 만났다. 그는 아예 무슨 보물단지라도 되듯 라디오를 손바닥에 받쳐들고 걸었다. 뉴스 시간이었다. 아나운서의 속도감 있고 또박또박 귀를 울리는 목소리가 그의 손에서 쏟아져 나왔다.
산 속에 들어와서 조차 세상일을 저렇게 잊지 못하다니!

그런 이들은 가까운 동네 산에서만 보는 게 아니다. 설악이나 지리산을 가도, 바닷가 피서지를 가도 가끔 만난다. 세상 속의 일을 한 시라도 놓쳐서는 안 될, 그런 직업을 가진 사람들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냥 세속의 나와 같은 범속한 이들이다.

 

 

나는 라디오를 들으며 내 곁을 지나쳐간 사람을 돌아다 봤다. 당당한 걸음을 걷는 이가 아니다. 움추러든 듯한 뒷모습이다. 산길을 걸어 내려가는 그의 뒷모습을 나는 한참이나 바라봤다.

외로움을 타는 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그 길이 어느 길이든 혼자 걸어가기에 외로운 사람. 자식이 있고, 아내가 있고, 친구가 있다 해도 살아가는 일이 늘 외롭기만한 사람.
나는 다시 산을 오르며 그의 일상을 생각했다. 가족이 있다 해도 살면서 부딪히는 걱정을 털어놓을 수 없고, 무슨 말을 해도 들어주기는커녕 고개를 돌리는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그를 외면하는 사회. 그에게 열 명의 가족이 있고, 열 사람의 친구가 있다한들 그는 외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쩌면 그에게 가장 절친한 벗은 라디오일 수도 있겠다. 때로 웃음을 주고, 때로 위로 받을 수 있고, 때로 희망을 얻을 수 있는. 남들 모두 자신을 외면할 때에도, 지금처럼 산속을 외로이 걷고 있을 때에도 라디오는 변함없이 자신의 곁으로 찾아와 함께 걸어주었다.

 

그러고 보면 나에겐 라디오에 대한 편견이 있다.

집에는 선물 받은 라디오가 있다. 짙은 갈색의, 옛날 냄새를 풍기는 큼직한 라디오다. 가끔 비 오는 일요일이나 눈 내리는 날 한 번씩 켜 본다.

그러니까 내가 생각하는 라디오는 그냥 옛날 멋을 가끔 누려보는 장식품이다.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그러나 산중에서 만나는 이들의 라디오는 나와는 너무도 다르다. 그들의 라디오는 장식물이 아니라 세상을 외롭지 않게 함께 살아주는 또 다른 가족이며 친구며 사회다. 그들이 왜 산중까지 라디오를 켜고 다니는지 그 이유를 오늘에야 알겠다.

 

(교차로신문 2009년 2월 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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