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 연재 칼럼

수묵화 속을 호젓이 걸어가는 사람

권영상 2013. 6. 19. 17:09

 

 

 

수묵화 속을 호젓이 걸어가는 사람

권영상

 

 

 

 

창을 여니 펑펑 눈이 내린다. 잘 마시지 않는 커피가 이럴 때면 생각난다. 커피 한잔을 타 들고 창밖의 눈 내리는 풍경을 바라본다. 일 년 중 이런 호사를 누리는 일이 몇 번인가. 그러나 그 호사스런 여유도 잠깐일 뿐이다. 커피 서너 모금을 넘긴 뒤부터 온갖 근심 걱정에 휩싸인다. 미루어둔 일들이 내 몸을 온전히 두지 않는다. 몸은 창밖의 눈을 바라보지만 머리는 여유롭지 못하다.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일의 유혹에 빠지기 전에 ‘산으로 가자’는 생각이 일었다. 그 마음이 또 흐지부지 되기 전에 부랴부랴 옷을 챙겨 입고 눈 속에 들어섰다. 한껏 눈을 맞아본다. 휘적휘적 산길을 오른다. 이것도 호사라면 호사다.

 

 

함박눈 내리는 산은 적막하다. 마른 낙엽에 사각사각 떨어지는 겨울눈 소리가 오히려 산을 고적하게 만든다. 침묵하며 서 있는 나무들이 그렇고, 떡갈나무 숲 사이로 사선을 그으며 날아드는 눈발이 그렇다. 눈으로 온 산이 하얗게 덮여간다. 그러나 눈 내리는 반대 방향의 나무줄기나 낙엽들은 거뭇거뭇하다.
점묘법처럼 촘촘히 찍혀난 검정과 흰색의 대비가 오히려 흰 눈 일색보다 아름답다. 마치 한 장의 수묵화 같다. 그러고 보면 이 고적한 산길을 걸어가는 내가 수묵화 속 바로 그 나그네다. 괴나리봇짐에 지팡이를 짚고 적막한 설경 속으로 걸어가는 사람. 행색이 조금 다를 뿐이지 지금 수묵화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는 사람은 분명 나다.


 

 

나는 누구인가.

쉰을 훌쩍 넘긴 사내다. 자식이 있고 가정이 있다. 일 년씩을 살면서 나 자신을 위해 덥석 이만한 호사를 누릴 여유가 없다. 마음으론 여유를 누리며 살아야지, 살아야지 하면서도 막상 시간을 만들어 내 앞에 놓아준대도 성큼 그 시간을 즐길 줄 모른다. 그러기에 가족들조차 나의 일 중심의 삶을 싫어한다. 그러고 보면 나는 가족들로부터도 호감 받는 인물이 아니다. 가족들과의 좋은 대화방법도 모른다. 좋은 식사를 즐길 줄 모르고, 멋진 옷을 입을 줄 모르고, 통쾌한 유머를 구사할 줄도 모른다.

 

이미 몰락한 왕조의 제왕과 다를 바 없다. 가족들의 바람과 기대를 알아채지 못한다. 낡은 방식을 보검처럼 아끼는 제왕이다. 외식을 나가도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고집한다. 자식에게는 새 것 보다 구식의 복장을 강요한다. 대화랍시고 할 때는 언제나 ‘아빠가 어렸을 때는’을 녹음기처럼 반복하며, 명령조의 대화 외에 아는 게 없다.
가족을 위해 살아오느라 정작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못했다고 가끔 투덜댄다. 그러나 내가 해 보고 싶은 일을 하려고 몸부림 쳐 본 적은 불행히도 없다. 그냥 먹고 사는 일에 스스로 노예가 되고 말았다. 한 번도 그 사슬을 끊어보려고 자신이 번 돈의 일부를 그 일을 위해 써 본 적이 없다. 다시 젊음을 산다면 ‘그땐 다를 거야’라고 말하지만 다시 젊음을 되돌려준대도 그렇게 못 살 사람이 나다. 나는 늘 나의 인생을 그렇게 살아왔다. 그게 모두 자신의 어깨에 지워진 짐 탓이라고 변명하면서.

 

그런 가엾은 사내가 여기 눈 내리는 호젓한 수묵화 속을 걸어가고 있다. 그가 오르는 거대한 산에 비한다면 그의 존재감은 너무나 보잘 것 없고 가볍다. 그래도 이만한 호사를 누릴 수 있는게 또 어딘가. 꼬박 두 시간 눈을 맞으며 한 바퀴 산을 돌아 수묵화 속을 걸어 내려왔다. 이만한 호사를 누렸다고 달라질 것이 뭐가 있겠는가. 질척이는 눈길을 내달리는 차량들의 소음 앞에 또 내가 서 있다.

 (교차로신문 2009년 2월 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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