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씨의 위대함
권영상
풀씨에 대한 편견을 나는 가지고 있다. 그들만이 갖는 매력 때문이다. 밭에서 ‘풀과의 전쟁’을 해 본 이들이 이 말을 듣는다면 흥분할 것이다. 그러나 거대 도시의 도심 아파트에 몸을 기대고 사는 나 같은 이들에겐 그런 편견이 있을 수 있다.
주말을 얻으면 집에서 좀 떨어진 산에 가끔 간다. 그나마 내가 자연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지난 여름, 산에서 돌아온 바지에 씨앗 하나가 매달려 있었다. 도꼬마리씨였다. 그 녀석이 나를 따라 내가 기거하는 내 집까지 온 것이다. 뜯어내려니 따갑다. 녀석은 씨앗주머니에 갈고리가 있다. 그것으로 그가 누구든, 그곳이 어디든 그를 믿고 따라간다. 도꼬마리에겐 상대를 신뢰하고 그와 동행하는 성품이 있다.
베란다에 둔 선인장 화분을 들여다 보니 거기에 파란 풀포기가 살고 있다. 벌써 4년째 그 자리에 둔 화분인데 난데없이 들풀이 와 살고 있다니! 봉숭아물을 들이는데 쓰는 괭이밥풀이다.
“대체 어디서 날아왔을까.”
베란다 창을 열고 마당을 내려다봤다. 까마득하다. 괭이밥풀씨가 올라오기에는 너무나 높다. 선인장 화분의 흙을 담아올 때 괭이밥풀씨가 묻어온 것이 틀림없었다. 그 먼지 같은 씨앗은 화분 속에 4년을 은둔해 있다가 우연한 인연으로 살아난 거다. 햇빛 속 세상에 태어나기 위해 4년씩이나 조용히 침묵하는 그 기다림이 순결하기만 하다.
때로 민들레 꽃씨가 강을 건너는 걸 본다. 이쪽 방죽 잔디 사이에 노랗게 피는 민들레꽃은 강 건너 방죽에도 요란히 핀다. 오랜 세월에 걸쳐 민들레가 강 건너로 이주해 갔다는 증거다. 그들의 이주 능력은 탁월하다. 항상 먼 곳을 꿈꾸는 그들의 염원 때문이다.
선인장 화분에 자리 잡은 괭이밥풀은 베란다에 놓아둔 백일홍이며 마삭줄, 분꽃이며 나팔꽃 화분에도 건너가 산다. 볕 따가운 가을날 베란다에 나가면 탁! 탁! 탁! 제법 요란한 소리를 내는 녀석들이 있다. 괭이밥풀씨다. 그들은 저희들의 조그마한 풀씨주머니를 터트려 이웃 화분으로 건너간다. 나는 그 겨자씨만한 씨앗들의 용기에 놀란다. 왜냐하면 사방으로 달아나는 씨앗의 대부분은 흙없는 바닥으로 떨어지고 만다는 것 때문이다. 수많은 씨앗들의 헌신없이 괭이밥풀씨는 살아남을 수 없다.
몇 년 전, 제주의 남쪽 바닷가에 있는 한 암자에서 노란 분꽃씨를 얻어 온 적이 있다. 암자 마당에서 여름햇볕을 온전히 받으며 큰지라 분꽃둘레가 두 아름은 되었다. 노란 꽃빛이 눈부셔서 씨앗 둘을 얻어왔다. 볕이 부족한 베란다에서 힘들게 크는 걸 보며 그들을 옮겨온 죄책감에 빠진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런 나의 마음과 달리 그들은 잘도 컸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와도 꽃피우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참으로 놀라운 건 바깥에 펑펑 눈이 내리고 있는데도 쉬지 않고 꽃을 피운다는 점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일이 있었다. 빗물을 받아내리는 홈통 작은 틈에서 벌써 손가락만하게 커오른 분꽃순이었다. 어미꽃에서 떨어진 씨앗이 홈통 틈바구니에 끼인 것이다. 그는 그 위태로운 곳에 버티고 서서 목숨을 키우고 있었다.
“생명이란 정말 위대한 거구나!”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이 혹한에도 그 녀석은 연일 꽃을 피우고 있다. 내가 풀씨에 대한 편견을 갖는 이유가 이것이다. 이 위대함 때문이다.
(교차로신문 2009년 1월 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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