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 연재 칼럼

겨울나기

권영상 2013. 6. 18. 14:01

 

 

 

겨울나기

권영상

 

 

 

 

K형, 그간 겨울이 예년보다 푸근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지난 이틀간은 혹독하도록 추웠습니다. 갑작스레 영하로 뚝 떨어졌습니다. 어제는 영하 12도였습니다. 귀가 시리고 볼이 따끔거렸습니다. 그 바람에 허약한 짐승처럼 잔뜩 움츠리고 지냈는데 자고나니 글쎄, 이번엔 눈발입니다. 찔레꽃 같은 눈송이가 무덕무덕 내립니다. 나는 서둘러 등산을 생각했습니다. 옷을 챙겨 입고 눈속으로 들어가 집 앞 우면산을 비틀거리며 올랐습니다.
오솔길만 골라 걸었지요. 이런 날은 인적이 드문 오솔길을 조용히 걸으면 제맛입니다. 낙엽이 수북수북 쌓인 길 위에 눈이 한겹씩 내려쌓입니다. 나는 저벅저벅 눈을 밟으며 산을 한바퀴 돌아왔습니다. 집에 들어설 때쯤 눈발은 희미한 기억처럼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방청소를 하기로 했습니다. 타올 걸레를 빨아 무릎을 꿇고 방을 닦았습니다. 이럴 때가 아니면 오만한 내가 어디에다 무릎을 꿇어 보겠습니까.

방을 다 닦고 나자, 이번엔 거실 안으로 겨울볕이 소복히 쏟아져 들어옵니다. 참 변덕스런 날씨입니다. 나는 한쪽 커튼을 마저 훌쩍 걷었습니다. 그러자 유리문 통째로 햅쌀 한 섬치의 햇볕이 내려와 쌓입니다. 가을 추수를 한 것처럼 마음이 넉넉해집니다. 이 노랗고 뽀오얀 햇볕이 햅쌀만 못할 리 없지요.

 

 

 

방앗간에서 갓 찧어온 쌀가마에 손을 찔어보듯 햇볕무덕에 손을 디밀어 봅니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햇볕에 간질간질합니다. 갑자기 이 햇볕을 가지고 싶다는 욕심이 났지요. 나는 그만 햇볕더미 안에 들어가 앉았습니다. 햇볕이 날아오는 하늘을 보니 머지않아 이 고운 햇볕도 건너편 아파트 머리에 빼앗기고 말 것 같습니다.

생각이 거기에 닿자, 햇볕이 아까워졌습니다.

나는 웃옷을 벗었습니다. 팬티는 둔 채 바지도 벗었습니다. 그렇게 앉아 가부좌를 틀었습니다. 햇볕이 내 맨살덩이 위로 내려서는 소리가 요란합니다. 온몸이 간지럽습니다. 살갗이 따끔따끔합니다. 순한 벌레들이 내 몸을 염치없이 마구 짓밟는 것 같습니다.

 

 

햇볕을 함뿍 받으며 고요히 눈을 감습니다. 요란을 떨던 내 몸의 안쪽이 자연스레 침묵합니다. 해는 위엄있는 성인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니 그 위엄 앞에 침묵하지 않을 수 없지요.

11월부터지요. 미명의 시간에 출근을 합니다. 어둑한 길을 걷습니다. 그리고 일몰의 흔적이 다 사라진 어두운 길을 걸어 퇴근을 합니다. 직장이라고 해 봐야 하루종일 햇볕에 나서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 제대로 볕 구경을 한 적이 오래된 듯 합니다.

 

 

예전에는 말이지요. 오랫동안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린 뒤 해가 나면 햇볕 달굼이란 걸 했습니다. 오랫동안 해를 못 보면 몸이 눅고 기운이 처집니다. 처진 기운을 돋우기 위해 해가 잘 드는 곳에 나와 오래도록 볕을 쬐었습니다. 달리 양지 달굼이라고도 했지요.
볕이 모자라는 내가 지금 햇볕 달굼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설거지를 하고난 아내도 내 곁에 남아있는 햇볕 속에 들어와 앉습니다. 아내는 볕도 아깝고 시간도 아까운 모양입니다. 책을 들고 와 글을 읽습니다. 요즘은 대낮에도 전등을 켜고 책을 읽어야하는 세상입니다.

근데 환한 햇볕에 나와 앉아 책을 읽으면 감흥도 다를 테지요.

 

 

 

우리는 거의 삼십 분을 그러고 앉았습니다. 해가 건너편 아파트 머리로 사라질 무렵, 햇볕을 털고 일어났습니다. 거짓말이긴 하지만 그 사이에 온몸이 검게 그을은 것 같습니다. 어떻든지, 나는 오늘 햇볕을 잘 쬐었습니다. 오늘 받은 이 따뜻한 햇볕의 열량으로 충분히 추운 겨울을 날 수 있겠습니다. 추워도 춥지 않게, 쓸쓸해도 쓸쓸하지 않게 잘 견딜 것 같습니다.

K형, 세상살기가 변덕 심한 겨울처럼 자꾸 어려워집니다. 춥지 않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교차로신문 2008년 12월 1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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