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든 것도 다 한 때여
권영상
토요일 오후엔 김장밭에 가야한다. 배추를 묶어줄 때다. 비록 작은 밭이지만 거기에 배추 서른한 포기와 무 마흔 여섯 개가 건장하게 자라고 있다. 올핸 뭐든 풍년이란다. 풍년인 탓에 우리 밭의 무와 배추도 튼실하다.
“오늘 배추 묶어주는 거 잊지 말아요.”
농사일에 문외한인 아내가 아침부터 재촉이었다. 좁은 밭에 뵈게 심어놓았으니 배추포기가 벌어질 리 없다. 그냥 두어도 스스로 알이 차고 남을 배추들이다. 그렇기는 해도 퇴근을 하자마자 아내와 밭으로 갔다.
준비해간 끈으로 배추를 묶었다.
그 동안 아내는 무 이랑에 들어서서 싱싱하게 자라고 있는 무청을 떼었다. 무청도 무청이려니와 무 크기가 사발통만 하다. 어찌나 잘 자랐는지 무가 선 두둑의 흙이 터져나갈 정도다. 배추를 묶다 허리를 펼 겸 일어섰다. 생각할수록 무와 배추가 이토록 실하게 커준 일이 기특했다.
지난 8월 중순이었다.
때 맞추어 무씨를 넣고, 그 한 주 뒤에 배추모종을 했다. 그 다음 주에 간신히 틈을 내어 한번 들르고는 다음 한 주는 사정이 있어 밭을 찾지 못했다. 한 주일내내 밭에 못 간 것이 마음에 걸렸다. 웃자는 말이지만 비록 4평지기 ‘농군’이어도 만석지기 농사꾼의 애닯은 마음과 다를 바 없다. 그 주를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웬걸, 밭에서 전화가 왔다. 벌레가 무와 배추를 다 먹어치운다는 것이다.
그 소리를 듣자, 가슴이 쿵,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무 한 개, 배추 한 포기 제 손으로 키워보지 않은 사람은 그 마음을 모른다. 마치 공들여 키운 자식이 잘못 됐을 때의 아비 심정과 같다. 토요일 퇴근을 하자마자 밭으로 달려갔다.
김장밭은 너무나 참혹했다.
어린 무와 배춧모에 푸른 빛이 한 점도 없었다. 모두 벌레들이 갉아먹어 온통 흰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생각 같으면 농약을 훅, 치고 싶었다. 그러나 벌레들을 그렇게 무참히 박멸하는 것도 안 될 일이지만 무엇보다 무농약 재배라는 내 원칙을 깨뜨릴 수가 없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벌레를 잡을 양으로 김장밭에 쪼그려 앉았다. 암만 봐도 다시 살아날 가망이 없었다. 잎을 다 떨구어낸 겨울철 앙상한 나뭇가지 같았다. 들고간 돋보기로 무며 배춧잎을 뒤적여 봤다. 간신히 남아있는 마른 잎줄기마저 벌레들은 뭐가 부족한지 아직도 갉고 있었다.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손으로 그들을 떼어내거나 잡아나갔다. 저녁해가 다 가도록 벌레를 잡고 일어섰다.
그러고는 잘못을 속죄하자는 심정으로 마른 밭에 물을 흠뻑 줬다. 이만하면 됐거니, 하고 밭을 나서다가도 또 물을 길어주고 주고…. 그렇게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속으로 올 김장은 글렀구나 했다. 그런데 그건 나의 속단이었다. 한 주일 더 벌레몸살을 하고 나더니 무와 배추가 눈부시게 자라오르기 시작했다. 생명력이란 놀라운 것이었다. 온 힘을 천둥처럼 밀어올리고 있었다.
“벌레 꾀는 것도 다 한 때여!”
내 밭을 건너다 보던 밭주인 할아버지가 웃었다.
사람인들 왜 무, 배추에 벌레 꾀듯 고통을 겪을 때가 없겠는가. 그러나 그것도 다 지나놓고 보면 ‘한 때’였던 것 같다. 그때를 잘 견디면 그때를 보상받듯 그보다 더 큰 힘을 낼 수가 있다. 정말이지 아무 가망없던 무와 배추가 이렇게 장하게 커 줄줄 누가 알았겠는가.
(교차로신문 2008년 12월 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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