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쇠 좀 맡아 주시겠어요?
권영상
서울에 와 산 지 꽤 오래 됐다.
여기 와 살면서 나는 여러 번의 이사를 했다. 나만 그런지는 몰라도 가끔 살던 동네에 가 보고 싶은 때가 있다. 토요일 퇴근길에 일부러 그쪽 길로 들어섰다.
우리가 살던 집은 조그마한 연립이었다. 그 집은 부동산중개소를 통하여 얻지 않았다. 동네 가게 여주인을 통해서였다. 아내와 나는 집을 보러 다니다 길갓집 가게 의자에 앉아 주스를 마시고 있었다.
그때였다.
그 가게 여주인은 우리의 마음을 어찌 알았는지, 먼저 집 이야기를 꺼냈고, 주스가 인연이 되어 아내와 나는 그 여주인의 소개로 어렵지 않게 우리가 살, 우리 형편에 닿는 조그마한 보금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우리는 그 집에서 꼭 10년을 살았고 그 집에서 딸아이를 초등학교 6학년이 되도록 키웠다. 뜻밖에도 우리에게 살 집을 보아준 그 가게가 ‘우리상회’다. 가게는 조그만했지만 50대 초반의 가게주인은 마음씨가 따뜻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에도 아내는 직장을 가지고 있었다. 직장을 가진 엄마가 자식을 키운다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참 힘들었다. 힘든 일 중의 하나는 집 열쇠였다. 열쇠 없이 딸아이가 놀러간 사이 갑자기 볼일이 생기면 그때는 난처했다. 서둘러 학교에 가느라 열쇠를 가져가지 않았을 때도 그랬다. 그때마다 어려운 부탁을 드려야할 곳은 우리상회였다.
“죄송합니다만 애가 열쇠없이 나가서.”
부탁 중에 가장 민망한 부탁은 열쇠 부탁이었다. 작든 크든 가게 일에 바쁜 분에게 그런 부탁을 한다는 건 무례중에 무례였다. 엄밀히 보면 가게란 손님을 맞아 돈을 버는 일이다. 그 일에 대한 방해는 그 분의 생계를 방해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그 여주인은 늘 친절했고, 딸아이의 귀가를 어김없이 챙겨주었다.
그분은 가끔 고향인 서해안에 다녀오면 그곳에서 나는 해산물이나 과일을 맛보라며 집으로 보내오곤 했다. 다른 일도 아닌 잡화를 파는 가게라면 ‘현지 해산물 갓 입하’ 뭐 이런 식으로 판매를 할만도 한데 오히려 나누어 먹길 좋아했다. 우리가 어렵잖게 집을 구한 것도 그 분의 그런 자상함 때문이었다.
나는 그 우리상회를 떠올리며 예전 우리가 살았던 동넷길로 들어섰다. 그런데 동네가 달라졌다. 우리가 살던 연립은 큼직한 아파트로 변해 있었고, 그 자리에 있을 줄 알았던 우리상회도 없어지고 말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아!’ 하고 망연히 그 자리에 섰다.
10년 전, 어린 딸아이를 키우며 힙겹게 살았던 과거가 한꺼번에 사라진 듯 허전했다. 무엇보다 동네 성가신 일들을 자상히 돌봐주시던 우리상회 ‘여주인’을 잃었다는 게 마음 아팠다.
발길을 돌렸다. 마을길을 되돌아 나오며 보니 큼직한 마트가 세 군데나 서 있다. 어쩌면 이 큼직한 마트의 위세에 ‘우리상회’가 밀려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트의 번쩍이는 유리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 보았다. 우리상회의 여주인처럼 자상히 반겨주는 이라곤 없다.
혹, 우리 집 열쇠 좀 맡아달라고 부탁하면 저들은 나를 뭐라고 비웃을까.
동네의 덩치가 더 커지고, 풍족한 마트가 세 개씩이나 들어섰다 해도 왠지 소중한 것을 잃은 것처럼 마음이 허전하기만 하다.
(교차로신문 2008년 10월 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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