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 연재 칼럼

엄마와 딸

권영상 2013. 6. 12. 20:46

 

 

 

엄마와 딸

권영상

 

 

 

 

그 건물의 이층은 고속버스터미널이다.

거기엔 값싸게 마실 수 있는 자판기 커피가 있고, 잠시 쉴 수 있는 자리들이 넉넉하다. 무엇보다 휴가철 도시와 시골을 오가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을 한없이 바라보는 것도 휴식중의 큰 휴식이다. 땀을 흘리며 등산을 하거나 폭양의 바다를 어슬렁거리는 것도 좋다. 그러나 붐비는 버스터미널에서 여름을 맞고 보내는 이들을 보는 것도 좋다.

 


“아, 서방님! 나 지금 여기 대합실 한복판에 있는데….”

터미널 커피자판기를 향해 가는데 어디선가 투박한 목소리가 난다. 시골버스 안에서 많이 듣던, 정든 목소리다.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퍼머 머리를 하고 한복을 차려 입은 여자분이다. 마중 나오기로 약속한 시동생과 통화를 하는 모양이다. 옷차림이나 목소리가 어머니 안 계시는 내 고향의 형수님 같다. 연세며 검게 그을은 얼굴이며 머리 모양새 또한 그렇다. 나는 형수님을 떠올리며 커피를 뽑아 아무데나 비어 있는 자리에 앉았다.
그때 불현 나이든 엄마를 앞세운 젊은 엄마가 딸아이를 데리고 와 내 곁의 빈 의자에 앉는다. 아마 휴가철을 맞아 그간 모시던 엄마를 배웅하는 길인 듯 했다.

 


 

“엄마, 이제 그 치마저고리 좀 그만 입고 다니세요. 불편하잖아요. 불편도 불편이지만 세탁하려면 또 좀 까다로워요.” 젊은 엄마는 서른 후반이다. 의자에 앉자마자 엄마가 입은 옷을 탓한다. 얼굴이 통통하고 눈썹이 검다. 한눈에 보기에도 선하다. 버스표를 들고 선 젊은 엄마는 엄마를 보내드리는 게 마냥 아쉬운 표정이다.

 


“그러니 좀 편하게 입어요.”

젊은 엄마는 의자에 앉은 엄마 앞에 다시 쪼그려 앉았다. 엄마를 쳐다보며 매우 애틋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아빠는 말이 없는 분이잖아요. 근데 이번에 보니까 엄마 잔소리가 더 는 것 같아요. 아무리 아빠가 나이 많이 잡수셨다 해도 아빠는 남자예요. 남자는 여자가 잔소리하는 거 안 듣는대요. 건성으로 듣는대요. 그러니 엄마 잔소리 좀 줄여요. 엄마 마음이야 알지만.”
곁에 앉은 나는 속으로 씩, 웃었다.

언젠가 내 딸아이가 즈이 엄마에게 하던 말과도 똑 같았다. 자식이 커서 부모의 잘못을 나무라 주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아빠한테 좀 더 잘해주세요. 남자들은 나이 먹으면 여자보다 더 외로움을 탄대요. 작은 일에도 삐치고, 혼자 눈물 흘리는 일도 많대요.”

그 무렵이었다.

“3시 10분 일반우등 손님, 어서 타세요!”

그러는 소리가 승차장 쪽에서 났다. 손에 든 표를 확인한 젊은 엄마가 얼른 일어났다.

 

엄마를 모시고 나가는 젊은 엄마가 “엄마, 알았지?” 하며 또 한번 다짐을 받는다.

“알았다.”

단지 그 말을 하며 딸의 손을 잡고 내 곁을 떠나가는 모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세상을 어느 정도 이해한 딸이 나이든 엄마의 생애를 염려해주는 모습만큼 아름다운 일도 없다. 커피를 마시고 일어서려는데 배웅을 마친 젊은 엄마가 제 딸아이를 데리고 내 앞을 지나간다.

 


“엄마 모르지? 엄마도 잔소리 많어.”
다섯 살쯤 돼 보이는 갈래머리 딸아이가 엄마를 쳐다보며 말한다. 그러는 어린 딸아이의 얼굴이 엄마를 닮아 통통하고 눈썹이 검은 게 예쁘다.

(교차로신문 2008년 8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