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상술
권영상
언론에 5,60년대 술집 외상 장부가 공개 됐다. ‘사직동 대머리집’ 외상 장부로, 서울역사박물관에 전시될 거란다. 술집 외상장부라는 말에 왠지 아련한 향수가 인다. 이 땅에 발을 대고 사는 5,60대 사내들이라면 누구나 외상술의 기억이 있을 터다.
체질적으로 술을 좋아하는 내게도 물론 그런 추억이 있고 말고다. 청년 시절에 즐겨먹은 술은 주로 탁주였다. 모서리가 다 닳은, 술 탁자 두 개가 놓인 비좁은 술집이었다. 음침하고 사방이 꽉 막혔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촉수가 낮은 희미한 전등불과 자욱한 담배 연기가 늘상 우리를 맞았다. 술집 안주인은 대개 우리들의 주머니 사정을 안쓰러워했다. 그런 까닭에 우리를 위해 우리의 주머니 사정만큼만 술을 내놓았다. 그런 중에도 술값이 넘치면 단연 외상이었다. 직장을 얻기 전엔 주로 공사장을 전전했고, 거기서 얻은 돈으로 친구들과 즐겨 술을 마셨다.
그 후, 내가 직장을 얻게 되자, 내 직장 근처로 친구들이 모였다. 객지에 나온 나는 하숙을 했다. 국가적으로 저축을 장려하고 그걸 계몽하던 때였는데도 나는 저축이란 걸 몰랐다. 월급을 받으면 내 하숙의 유일한 세간인 ‘비키니 옷장’ 위에다 월급을 올려놓았다. 그러고 술친구들이 오면 ‘곶감꽂이의 곶감 빼먹 듯’ 그걸 꺼내 술값을 했다. 월급봉투를 받아들고 보름이 지나면 늘 월급은 바닥이 났다.
나의 외상 행각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하숙집에 들어가 혼자 하는 저녁식사는 무엇보다 싫었다. 그렇기에 하숙집 저녁밥 대신 주로 술집의 술탁자를 찾았다.
술을 마시다 술값이 없으면 술김에 하숙집에 전화를 걸었다. 하숙집 주인은 착하기만 했다. 밤이 늦기 전에 어린 아들이나 딸의 손에 모자라는 술값을 쥐여 보냈다. 그러나 그런 부탁도 늘상 할 수는 없었다. 그게 어렵게 되면 외상이었다.
“아줌마, 그어주세요.”
장부에 금을 긋듯이 손짓을 하면 통과였다. ‘긋는’ 것은 지금으로 말하면 신용카드와 성격이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전전하여 술을 먹은 뒤 월급날이 되면 순례하듯 외상술값을 갚으러 술집을 돌았다. 이게 또 문제다. 술값을 갚고 나면 그냥 술집을 나설 수 없다. 주인은 단골이라며 술 한 잔을 푸짐하게 낸다. 그 술에 또 취한다.
그 시절은 신용도 있었지만 정도 있었다. 생면부지의 사람에게도 술외상은 되었다. 주민증이 필요했다. 그러나 신분증 없이도 믿음을 보이면 외상은 되었다. 외상술값 변제가 늦으면 때로 술집 못된(?) 안주인은 직장으로 찾아와 술값을 받아갔다.
“얼른 얼른 술값 좀 갚아요.”
동료들이 대놓고 그런 말을 하면 그게 그리 부끄럽지 않았다.
그 무렵엔 얼마간의 외상술값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멋이었다. 이념이었고, 사상이었다. 젊은 우리들은 두둑한 저금통장을 오히려 부끄러워했다. 술과 예술과 빈 껍데기 이념일지언정 그런 걸 더 가치 있다고 뻗대며 살았다. 확실히 술빚 독촉에 시달리며 사는 청춘이 더 부유해 보였다.
그 시절, 술자리의 안주는 주로 문학이었다. 러시아 리얼리즘과 아나키즘. 그 길고긴 안주 탓에 술은 일차에 끝나는 법이 없었다. 언제나 ‘술 한잔’으로 시작하지만 3차나 4차로 끝이 났다. 통금을 목전에 두고서야 아쉽게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 좋던 외상술도 산업화가 되면서 사라졌다. 배고픈 이념보다 황금을 숭배하는 풍조가 번졌다. 술집도 ‘긋는 것’ 보다 현금만을 원했다. 그러면서 점점 사람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고 신뢰가 붕괴되면서 급기야 외상술값 없는 오늘에 이르렀다.
(교차로신문 2009년 8월 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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