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 연재 칼럼

마당을 하나 가지고 싶다

권영상 2013. 6. 27. 15:53

 

 

마당을 하나 가지고 싶다

권영상

 

 

 

 

 

이른 아침에 출근을 할 때면 아파트를 보살펴 주는 분들이 마당을 쓴다. 집 밖을 나와 처음 만나는 분들이다. 안녕하세요? 나는 그분들에게 깍듯이 인사를 한다. 그분들도 비를 들고 잠시 내 인사를 받는다.

 

 

어렸을 땐 나도 매일 아침 마당을 쓸었다. 아버지가 식전에 전답을 둘러보시러 가면 그 사이 나는 마당을 쓸었다. 손 위로 누님이 있었지만 어머니는 한결같이 내게 그 일을 시키셨다. 아침 마당을 여는 사람이 사내 아들이어야 한다는 게 어머니 지론이셨다.

농사를 짓는 농가의 마당이란 게 굉장히 크다. 보리든 벼든 콩이든 들깨든 모두 마당에 들여와 기계로 털었다. 그러니 마당은 집이 깔고 앉은 자리보다 더 컸다.장마가 끝나면 마당은 상처투성이다. 마당이 험하면 타작이 어렵기에 아버지는 격년으로 고운 산 흙을 실어날라 마당을 반듯하게 고르고 다졌다. 그런 마당을 아침마다 깨끗하게 쓸고 나면 마음이 마당처럼 반듯해진다.


 

 

 

지금 가만히 생각해 보면 마당이란 방안에서만 크던 아기가 세상으로 나가기 위해 첫걸음을 떼던 곳이다. 안방에서만 걸음마를 하던 아기도 방안이 좁아질 때가 있다. 그 무렵이면 어머니는 아기를 안고 마당에 나와 더 큰 걸음을 배우게 한다. 처음엔 서툴지만 차츰차츰 마당을 가로지르기도 하고, 몇 바퀴씩 돌기도 한다. 그마저 성에 차지 않으면 뛰는 법을 익히는 곳도 역시 마당이다.

 

 

글을 배우기 전에는 그 마당에 나와 사금파리나 꼬챙이로 금 긋기를 한다. 삐뚤빼뚤한 금 긋기가 차츰 바르게 그어지고, 일그러진 원이 차츰 동그랗게 다듬어진다. 손위 누나나 형을 통해 글씨라는 것을 익히는 곳도 마당이다. ‘어머니’라는 글씨도, ‘아버지’라는 글씨도, ‘바둑이’나 ‘태극기’라는 글씨도 공책보다 마당에서 연필 대신 사금파리를 들고 먼저 배운다.

 

 

 

마당은 사람만이 차지하는 공간이 아니다.

암탉이 병아리를 데리고 나와 모이 찾는 법과 솔개로부터 제 몸을 지키는 법을 가르치는 곳도 마당이다. 병아리들 주위엔 항상 그들을 노리는 개나 고양이가 어슬렁거렸다. 그들은 어미닭이 한눈을 파는 사이면 뛰쳐나와 병아리를 물어 죽였다. 아직 세상을 모르는 아이는 검정개와 암탉과 병아리와 사람이 한 마당 안에 함께 어우러져 사는 법을 천천히 알게 된다. 마당은 그런 곳이다.

뜀박질을 배운 아이는 자전거를 갖고 싶어한다. 그 자전거를 익히는 곳도 마당이다. 어렵사리 자전거를 배운 아이는 대문을 나가 세상으로 열린 큰 길을 향해 달린다.

 

 

 

여름이면 마당에 멍석을 펴고 저녁을 먹었다. 멍석 곁에는 언제나 모깃불이 피어올랐고, 저녁이 끝나면 멍석에 누워 출렁출렁 지나가는 은하수를 바라보며 그 별을 세었다. 그러고 보면 우주와 처음 만나는 곳 역시 마당이다. 여름이 지나 가을이 오면 아버지는 날마다 우차에 볏단을 실어와 동네 사람들과 탈곡을 했다. 이른 새벽부터 마당에선 탈곡기가 돌아가고 탈곡이 끝나는 밤이면 마을 방앗간 정미기계가 찾아와 쌀을 찧었다.

 

 


밤새워 펑펑 눈이 내리면 또 어떤가? 아버지는 마당에 눈이 쌓일까봐 밤새도록 눈을 쓰신다. 농사일을 하시는 아버지에게 마당은 사랑방 만큼 소중한 공간이다. 일평생 그렇게 마당을 가꾸시던 아버지는 끝내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타고 가시던 상여는 마당에서 차려졌고, 누님들의 혼사도 그 마당에서 치러졌다. 사람을 보내고 맞는 일이 다 마당에서 이루어졌다. 농가의 마당이란 안방에서 태어난 아기가 성장하여 세상으로 나아가는 작은 징검다리다. 작으나마 나의 마당을 갖고 싶다.

 

(교차로신문 2009년 9월 1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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