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 연재 칼럼

오후 5시 10분경의 골목길 풍경

권영상 2013. 6. 30. 20:00

 

 

오후 5시 10분경의 골목길 풍경

권영상

 

 

 

오후 5시 10분이면 나는 퇴근이다. 별일 없으면 골목길로 접어든다. 직장이 산언덕에 있고 보니 나의 퇴근길도 하루의 오후처럼 내리막길이다.

여름장마가 지나간 뒤의 초가을 볕은 유별나다. 눈이 시릴 정도로 빛난다.


 

언덕에서 한 발짝 계단길을 내려서면 민가의 지붕이 다 보인다. 옥상 위 빨랫줄에서 저 혼자 마른 빨래가 뽀얗다. 손이 잰 노란 블라우스의 여자가 빨랫줄의 빨래를 걷는다. 해거름이면 빨래가 눅눅해진다. 초가을 오후 5시 10분은 뽀송뽀송한 빨래를 걷기에 알맞은 시각이다.

노란 블라우스의 여자가 한 팔에 빨래를 가득 걷어 안고는 해를 한번 쳐다본다. 눈이 부신지 찌푸렸던 눈을 고치고 옥상 계단길을 내려간다. 어떤 집 옥상에는 할머니가 허리를 구부려 볕 좋은 때에 열어두었던 장독 뚜껑을 또각또각 닫는다. 우기로 묽어진 고추장이나 간장독을 볕에 열어두는 걸 어렸을 적에 보았다. 쉬가 슬까봐 어머니는 눈이 고른 망사천으로 장독 아구리를 덮고 고무줄로 동여매어 놓으셨다.


 

 

 

천천히 골목길 담장을 끼고 내려간다. 길갓집마다 담장 위에다 화분을 키운다. 좁은 마당에 화분을 둘 수 없다. 볕 좋고 사람 손 타지 않는 담장 위 공간이 아깝다. 주로 손뼉 선인장, 들국화, 봉숭아, 실난, 채송화, 개량한 맨드라미 등이다. 대문 있는 집은 대문 위에 오가피나무나 더덕덩굴, 고추 화분을 키운다.

오후 5시 10분, 슬슬 저녁 준비를 할 이쯤이면 분꽃이 필 시간이다. 골목길에 내놓은 분꽃 화분에서 주홍 꽃이 피기 시작한다. 종일 볕을 받는 분꽃들이라 꽃만도 수백 수천 송이다. 길을 멈추고 꽃숲에 코를 밀어넣는다. 값비싼 유럽의 향수보다 더 화려하고 요염하다.


 

 

어느 집에선가 고양이란 놈이 널름 담장 위에 올라와 덥죽 화분 사이에 엎드린다. 검정바탕에 흰줄무늬 고양이다. 이울어가는 따근한 볕이 아쉬운 모양이다. 골목을 하나 돌아서자 승용차가 간신히 들어와 서 있다. 이 길을 오래도록 다녀 알지만 못 보던 승용차다. 아마 타지 사람이 타고온 모양이다. 근방에 친척이 있거나 아니면 봉제 일로 찾아오는 수가 있다. 차 유리에 노란 종이쪽이 붙었다.

‘죄송합니다. 오늘 하룻밤만 자고 가렵니다.’

내가 읽어도 차 주인이 어떤 분인지 알겠다. 미안함을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대추나무집 대문 앞 그늘에 할머니 한 분이 나와 앉아 있다. 펼친 종이상자를 깔고 앉았는데 입고 있는 옷이 단정하다. 젊은이! 하고 할머니가 내 걸음을 잡는다. 시골 고향 어머니를 닮았다. 가르마가 반듯한 할머니가 작은아들 집에 ‘댕기러 왔다’며 풋콩을 까고 있다. 저녁밥 준비를 하는 할머니가 심심하신지 고향 이야기를 꺼낸다. 포항 사는데 어젯밤에 올라오셨단다. 사람이 그리워 나왔다며 그분의 80년 인생을 잠깐 듣다가 일어선다.

 

 


5시 40분, 학원을 마치고 돌아오는 초등학생들이 하나 둘 눈에 띈다. 그들의 재깔대는 목소리가 유난히 맑다. 하루 공부를 다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니 홀가분할 테다. 길가에 늘어선 봉제공장은 일감이 많은가 보다. 환하게 켜진 형광등 아래 재봉틀을 잡은 손이 분주하다. 빠른 박자로 꿍짝거리던 노랫소리도 이때쯤이면 없다. 밤이 가까울수록 자연스레 사람 손이 빨라지기 때문이다. 한길에 내려섰다. 걸어온 골목안을 슬쩍 돌아다 본다. 옥상 위에서 물 호스로 화분에 물을 주는 사내들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그들의 건장한 몸에 슬슬 나무빛깔 어둠이 내린다. 가게의 간판과 골목 창문으로 마을 저녁 불이 하나 둘 꽃잎처럼 켜진다.

 

(교차로신문 2009년 10월 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