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 넘쳐나는 팥쥐 엄마들
권영상
서울역에서 사당행 4호선 전철을 탔다.
한산했다. 그런데 전철이 숙대입구역을 막 출발할 때다. 내 옆자리에 엉덩이를 빼고 비스듬히 앉은 여자가 휴대폰의 버튼을 눌렀다.
“아니, 너 지금 뭐하는데 엄마 전화 꼬박꼬박 받냐!”
여자 목소리가 내 귀를 꼭꼭 찔렀다. 사람들은 이 꼬챙이 같은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어 흘끔 여자를 봤다.
“원석이 바꿔봐!”
여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윽고 그 원석이가 전화를 받는 모양이다.
“형은 도대체 뭐하고 놀기에 엄마 전화 꼬박꼬박 받고 있냐?”
여자가 성을 냈다.
“학원서 받아온 천자문, 엄마가 스무 번 쓰라 했지. 그거 하고 있냐?”
목소리는 작았지만 차가웠다. 큰아들이 공부는 안 하고 전화나 받는다는 게 여자는 괴로운 모양이었다. 지시한 대로 따라주지 않는 자식이 미운 거다.
“형 잘 지키라 했는데 너는 대체 뭐하고 있어! 천자문 다 쓰면 책꽂이에 있는 명작동화 아무거나 한권 꺼내 읽어. 알았어?”
여자가 탁, 소리가 나도록 휴대폰을 닫았다.
조용히 눈을 감고 있던 승객들이 또 한 번 그 여자를 흘끔 바라보았다. 평소 큰아들의 행동이 여자는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다. 머리를 쓴 끝에 동생 보고 형을 감시하도록 했나보다. 아니, 어쩌면 서로 감시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여자가 다리를 꼬고 몸을 돌려 창밖을 내다본다.
한강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다리를 건너는 전철 바퀴소리에 그 여자의 통화가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고 있었다. 아니, 지우려 내가 애쓰고 있었다.
한강을 다 건넜을 때쯤 여자가 또 휴대폰을 꺼냈다.
“엄마 이제 다 왔거든. 도착할 때까지 숙제 다 해 놔. 알았어!”
저쪽 목소리를 듣는지 마는지 여자가 휴대폰을 거세게 닫았다. 그 순간 명작동화 중에서 엄마가 시킨 대로 ‘아무거나’ 꺼내드는 불안한 아이의 모습이 그려졌다. 아이는 그 사이 천자문은 다 썼을까. 전화나 꼬박꼬박 받은 그의 형은 또 얼마나 안절부절못하고 있을까.
어쩌면 엄마보다 한 수 위의 머리로 엄마를 속일 준비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모르는 여자는 그런 방식으로 자식을 길들이는 일에 만족해 할 것이다. 형 동생 간의 우애나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 같은 건 아예 안중에 없다. 엄마 없는 시간을 아이들이 창의적으로 놀고 쓸 수 있도록 여유를 만들어줄 줄도 모른다. 오직 공부다. 그 이외의 것은 지금 여자의 머릿속에 없다.
사당역에서 전철이 멈추자, 여자가 일어섰다.
나도 2호선으로 갈아타기 위해 일어섰다. 나는 앞 서 내린 여자를 얼핏 보았다. 전화 목소리와 달리 어느 동네 어느 길에서나 만날 수 있는 그런 마흔 줄의 여자다. 여자가 가는 뒷모습을 보며 나는 길을 바꾸었다.
‘혹시 팥쥐 엄마 아닐까?’
불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 자식이, 배 다른 자식이 아니란 것만 다르지 냉혹하게 대하기는 팥쥐 엄마와 다를 게 없다.
“조선 중엽, 전라도 전주 서문밖에 최만춘이라는 퇴직 관리가 있었다. 그는 아내와 20년을 같이 살았지만 불운하게도 슬하에 자식이 없어 하늘에 기도한 후 옥녀를 낳았으니 이름을 콩쥐라 지었다.”
이렇게 시작되는 ‘콩쥐팥쥐전’을 다시 들추어 읽는 마음이 착잡했다.
아내가 팥쥐 엄마 같았고, 그러는 걸 모르는 체 바라보았던 나는 꼭 콩쥐 아빠를 닮았기 때문이다.
소설을 들여다보면 콩쥐가 계모에게 당하는 설움이 많다.
밭에 김을 매러갈 때 팥쥐 엄마는 팥쥐에겐 쇠호미를 주어 모래밭 김을 매게 하고, 콩쥐에겐 나무호미를 주어 자갈밭 김을 매게 한다. 김을 다 맨 팥쥐는 집으로 가고, 혼자 남은 콩쥐는 부러트린 나무호미를 앞에 놓고 하염없이 운다.
그때다.
하늘에서 검정소가 내려와 ‘무슨 일이 있기에 그토록 우느냐? 자세한 이야기를 해 보라.’며 달랜다. 이제 그만 울음을 그치고 개울물에 손발 씻고, 얼굴도 말끔히 씻고 돌아오게 한다. 그 일을 다 하고 돌아오자, 남은 김은 다 매어져 있고, 좋은 호미와 과일을 치마폭에 싸준 뒤 검정소는 사라져버린다.
이 검정소는 그 상징이야 어떻든 죽은 콩쥐 엄마임이 분명하다. 우리가 바라는 보통 엄마의 모습이다. 자식이 절벽처럼 꽉 막힌 상황과 마주 앉아 괴로워한다면 부모는 당연히 따스한 말로 자식을 위로한다.
21세기 우리 사회에서 사라진 것 중에 가장 아쉬운 게 있다. 사람을 대하는 다정한 눈빛과 따스한 위로의 말이다. 어쩌다 그런 무형의 것은 구시대의 잔재처럼 다 사라지고 말았다. ‘돈’과 ‘성과’라는 낯선 경쟁주의가 그 자리를 차고 들어섰다.
진심이 담긴 말의 시대는 가버렸다.
오직 성과가 중요할 뿐이다.
너를 아프게 하는 것이 무엇이고, 네가 지금 좌절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대화하려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무슨 일이 있어 엄마 전화나 꼬박꼬박 받는지 알고 싶지 않다. 지금 시켜놓은 숙제가 중요하하고, 학교에서 받아오는 성적표가 중요하다.
자식의 능력보다 훨씬 높은 곳에 팥쥐엄마의 목표가 있기에 성적이 능력 이상이어도 더 잘 받으라는 구실로 칭찬 대신 타박을 하고, 성적이 낮아도 물론 구박한다. 긴장을 강화하여 독하게 키우려는 거다. 이게 경쟁주의의 실체다. 사람을 자꾸 분노케 하여 성과를 높이려는.
그러나 죽은 콩쥐 엄마의 모습으로 온 검정소는 다르다.
콩쥐의 눈물을 닦아준다. 개울가에 가 손발을 씻고, 얼굴을 씻고, 흐르는 물에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게 한다. 내가 왜 울고 있는지, 그것을 해결할 방도는 무엇인지를 스스로 발견하게 한다.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것이다. 콩쥐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고 판단되면 남은 김매기를 도와주고, 그간의 콩쥐의 노고에 대한 상도 내린다. 이것이 엄마의 본디 모습이다.
콩쥐는 착한 아이다.
과일을 치마폭 가득히 얻어오면서도 그는 식구들을 생각한다. 자신에게 무심한 아버지와 나누어 먹고, 구박하는 계모와 얄미운 동생 팥쥐와 함께 나누어 먹으려 한다. 누가 봐도 콩쥐는 착하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험난한 세상에서 착하게 산다는 건 어렵다. 착하게 산다는 건 칭찬할 일이 아니다. 착한 며느리의 속이 썩어 문들어지듯 착하게 사는 아이의 내부에 알게 모르게 눈송이처럼 차가운 분노가 쌓이기 때문이다.
콩쥐는 아버지뿐 아니라 계모와 팥쥐로부터 집단 외면을 당하며 산다. 가족 중의 그 누구도 자신의 속앓이에 귀 기울여 주는 사람이 없다. 그들은 가족이라기보다 콩쥐의 노동을 끝없이 착취하거나 분노를 자극하는 인물들이다.
팥쥐 엄마가 콩쥐에게 김매는 일을 시킬 때 그녀는 이렇게 꼬드긴다.
“시골 사는 계집애가 농사일을 몰라서 되겠느냐? 그러니 김을 매고 오너라.”
너무도 타당한 말이다.
그는 그런 식으로, 너무도 타당한 구실을 이유로 밭으로 내몬다.
오늘의 우리 팥쥐 엄마들도 똑 같은 방식으로 아이들을 학원으로 내몬다.
“다 너 잘 되라고 공부 공부하는 거 왜 몰라.”
이 말에 거역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너무도 옳은 말이기 때문이다. 엄마가 아니라 나 잘 되라고 공부 공부한다는 건데 누가 이 말을 거역하겠는가. 옛날의 팥쥐 엄마나 오늘 날의 팥쥐 엄마나 모두가 반기를 들 수 없는 말로 노동과 공부를 강요한다.
“일찍 김매고 와서 밥도 먹고 또 다른 일도 해야 할 게 아니냐!”
김 매고 밤 늦게 집에 돌아왔을 때 팥쥐 엄마는 위로보다 호통의 주먹을 먼저 날린다.
구절구절이 오늘의 우리 팥쥐 엄마들과 너무도 꼭 닮아 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하루에 ‘몇 탕’씩 무거운 가방을 메고 학원을 전전하는 아이들이 떠오른다. 아이들은 ‘한 탕’씩 학원을 마칠 때마다 다음 학원을 가기 위해 밤길을 뛴다. 뛰면서 휴대폰을 받는다. 학원 끝나는 시각을 손바닥 보듯 훤히 보고 있는 엄마가 다음 코스를 지시하는 전화다. 끝없이 학습을 강요한다.
애들은 친구들과 장난치며 집으로 돌아갈 틈이 없다. 가다가 놀기도 하고, 가다가 꽃잎 떨어지는 것도 보고, 가다가 개미떼에 물려가는 지렁이도 보고, 담장 위의 조기 한 마리를 물고 가는 고양이란 놈 좀 쫓아내고, 그러며 갈 수 없다.
시켜놓은 김매기 일찍 끝내고 또 다른 일을 연달아 해야하는 콩쥐처럼 우리의 아이들도 학원 '한 탕' 끝나면 서둘러 다음 학원으로 달려 가야 한다.
콩쥐가 팥쥐 엄마에게 노동 착취를 당한다면 요즘 아이들은 자신의 엄마에게 학습 착취를 당하고 있다. 착취당한다는 점에서 둘 다 다를 게 없다. 요즘 아이들은 그래서 피로하다. 유치원 시절부터 구구단을 외어야 하고, 우리말을 익히기도 전에 영어를 해야 한다. 예전엔 공부를 즐겨하던 애들이나 그걸 했다면 지금은 전국의 모든 아이들이 똑같이 그 일에 시달린다. 아이들은 피로하다.
어른들은 왜 피로감에 젖은 자식을 보면서 끝없이 공부를 강요할까.
‘당신은 언제 행복 하느냐’고 물으면 우리나라 부모들은 대체로 이렇게 대답한다고 한다. 자식이 좋은 대학에 입학했을 때. 두 번째 대답은 이렇다. 자식이 좋은 직장에 취직했을 때. 세 번째 대답은 자식이 결혼을 잘 할 때란다.
부모들이 왜 자식에게 공부를 강요하는지 그 이유가 분명해졌다.
자식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이라는 잘못된 행복관 때문이다. 공부! 공부! 하는 유교 국가들에 요즘 들어 부쩍 황혼이혼이 많아지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부모 곁을 떠나가는 결혼한 자식들 때문이다. 자식들이 떠난 이상 이제 부모에게 남은 행복이란 없다. 그러니 부부가 함께 살 이유마저 없어진 거다.
팥쥐 엄마는 행복하지 않다.
왜 행복하지 않을까. 그에겐 이미 콩쥐가 자식이 아니라 대척점에 마주 선 갈등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자식은 더 이상 자식이 아니다. 엄마 친구 아들 수준의 성적을 잡아와야 하는 도구이다. 그들 사이에 엄마와 아들은 없다. 푸근한 눈짓도 없고, 따스한 위로로 건강하게 자라길 바라는 엄마도 없다. 오직 엄마와 아들 사이에 성과라는 ‘성적’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걸 성취해 왔을 때 비로소 자식은 자식다운 대접을 받는다. 얼마나 비정한가.
그러나 그 성적에 만족을 느끼며 즐거워 해선 안 된다.
팥쥐 엄마가 행복해할 때 책상 앞에 앉은 아이들의 내면에 소리 없는 분노가 차오른다.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잘 하는 콩쥐의 분노도 분노지만 더 안타까운 건 우리가 팥쥐의 분노를 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키는 일을 척척 잘 해내는 콩쥐의 능력은 팥쥐에겐 가공할만한 스트레스다. 부익부 빈익빈이라고, 일 잘 하는 콩쥐에겐 그를 돕는 세력 또한 많다. 밭매기를 도와주고 위로해 준 검정소와 베짜기를 도와준 하늘에서 내려온 직녀가 있다. 그뿐이 아니다. 김감사와 결혼까지 시켜주어 신분 또한 가없이 상승한다. 한 집에 사는 팥쥐 입장에서 볼 때 이 일은 눈이 뒤집힐 일이다.
팥쥐는 처음부터 요사 간특한 아이가 아니다. ‘마음이 곱지 않고 얼굴이 덕스럽지 못 할’ 뿐이다. 그냥 보통 아이라는 것이다. 그런 팥쥐는 능력 있는 콩쥐 때문에 가슴에 분노가 쌓인다. 또한 적응력이 뛰어난 콩쥐에게 호의를 베푸는, 편견이 지배하는 사회구조도 팥쥐의 가슴에 분노를 키우게 한다. 마침내 팥쥐의 가슴에 쌓이고 쌓인 분노는 콩쥐를 연못에 빠뜨려 죽이는 잘못된 폭력으로 발전한다.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피로하다.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정글과 같다. 계모는 손 안에 붙잡히지 않는 콩쥐 때문에 피로하고, 콩쥐는 쫓아오는 계모 때문에 피로하다. 콩쥐는 저의 엄마에게 사랑받는 팥쥐 때문에 피로하고, 팥쥐는 능력 있는 콩쥐 때문에 피로하다. 이 소설에도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가정에 아버지는 있으나 존재감이 전혀 없는, 부성이 제거된 아버지가 있을 뿐이다.
시킨 일을 다 해놓고 콩쥐가 부랴부랴 외갓집 잔치에 갔을 때다.
“짜라던 베는 다 짜고 왔느냐? 말리던 겉피 한 섬 다 찧어놓고 왔느냐?”
계모는 쫓아온 콩쥐에게 소리친다.
엄마는 엄마 친구 집에 갔다 올 테니, 너는 그 동안 천자문 스무 번 쓰고, 다 하고 나면 명작동화 읽으라던 전철에서 본 그 엄마가 생각난다. 감당하기 힘든 천자문을 스무 번 쓰라는 거나 많은 양의 베 다 짜라는 거나 둘 다 잔혹하다. 그것만이 아니다. 그거 마치면 명작동화 다 읽고, 겉피도 한 섬 다 찧으란다.
이런 숨막히는 과제를 매일매일 떠안고 사는 콩쥐나 요즘 아이들 정서는 어떤 식으로 변해갈까. 이 아이들이 자라 남을 배려하고, 부모와 웃어른을 존중하고, 자신의 능력을 남을 위해 써주길 바란다는 건 어른들의 착각이다. 착각 중에서도 웃기는 착각이다.
경쟁 사회에서 경쟁을 비켜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다고 다음 세대에게 아무 이유 없이 이 고통을 그대로 물려 주어야 하는가?
그런데 뜻밖에도 이 소설에서 행운을 차지한 인물이 있다.
팥쥐도 죽고, 팥쥐 엄마도 죽지만 늦은 나이에 새 장가를 들고 호강까지하게 된 인물이 있다. 그가 콩쥐 아버지다. 의외이지 않은가. 가정을 위해 아무 역할도 하지 않은 듯 한 이 무심한 인물에게 어떻게 그런 놀라운 보상이 돌아갔을까. 단순히 김감사의 아내가 된 콩쥐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아니면 콩쥐를 좋은 아내로 잘 키워준 덕분에? 내 판단엔 후자인 좋은 아내로 잘 키워준 덕분에 그런 호의를 받은 듯 하다.
나는 이쯤에서 이 긴 글의 대답을 찾고자 한다.
어떻게 키우는 것이 자식을 잘 키우는 건지, 그 해답을 콩쥐 아버지의 '무관심한 듯한 자녀교육'에서 찾아보고 싶다. 지금은 지나칠만큼 자녀에 대한 욕심이 과잉이다. 과잉은 "콩쥐팥쥐전"의 결말이 그렇듯 콩쥐도 죽이고, 팥쥐도 죽이고, 팥쥐엄마도 죽인다. 좀 내버려두는, 제 스스로 성장하도록 조금 멀찍이서 지켜보아주는 콩쥐 아버지의 지혜가 필요하다. 그래야 내 아들도 살고, 남의 아들도 살고, 엄마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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