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이 오면 좀 산뜻해져야지
권영상
4월이 오면
마른 들판을
파랗게 색칠하는 보리처럼
나도 좀 달라져야지.
솜사탕처럼 벙그는
살구꽃 같이
나도 좀 꿈에 젖어
부풀어 봐야지.
봄비 내린 뒷날
개울을 마구 달리는
힘찬 개울물처럼
나도 좀 앞을 향해 달려 봐야지.
오, 4월이 오면
좀 산뜻해져야지.
참나무 가지에 새로 돋는 속잎같이.
제 동시 ‘4월이 오면’입니다. 2009년 사계절출판사에서 나온 동시집 <구방아 목욕가자>에 실려 있습니다. 그러니 이 시를 쓴 지 벌써 5년이 되었네요. 5년이 지난 지금에 읽어보니 그때 내가 얼마나 달라지고 싶어 안달을 했는지 속이 들여다 보이네요. 아마 그런 염원이 쌓여 그렇겠지요. 그로부터 5년이 지난 지금 나는 위험을 무릅쓰고 직장을 그만 두었습니다. 달라지고 싶었던 거지요. 그러나 달라진 시간 속에 앉았어도 4월에 대한 나의 또 다른 기대감은 여전합니다.
올해도 다가온 봄 앞에서 내가 새롭기를 바랍니다. 그런 기대와 설레임은 나이를 다섯 살이나 더 먹은 지금도 그렇습니다. 똑 같은 출근길을 따라 출근을 하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늘 다니는 그 길을 따라 퇴근을 했지요. 그리고 대개 정해진 그 시간에 저녁을 먹고 정해진 그 시각에 잠을 잤습니다. 공장에서 돌아가는 톱니바퀴와 내 삶이 다를 게 없었지요.
그런 까닭에 나름대로 내 삶의 구태한 틀과 방식을 바꾸어 보려고 애썼지요. 전철을 타던 길을 버스길로 바꾸어보고, 버스로 갈 길을 좀 힘들어도 걸어다녀 보기도 했습니다. 아무 볼일도 없으면서 대학로에 가 친구를 불러 술을 마셔보고, 광장동 광장시장에 가 명태도 사고 베개도 사서 들고와 봤지요. 내가 뭐 좀 바꾸어질까 해서 말입니다. 정말 아무 일도 없으면서 전철을 타고 인천도 가보고, 휴전선 근처 문산도 가 보고, 혼자 백령도에도 가 보았습니다.
또 하나, 늘 읽던 책을 버리고 나의 관심에서 먼데 있던 천체 물리학과 민중미술가 케테 콜비츠를 읽기도 했습니다. 삼림과 시장과 경제에 대한 책도 읽었지요. 아니 과학잡지를 구독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딴 길을 가려고 발버둥쳐도, 또 얼마 지나면 나는 또 그 옛날의 자리에 떡하니 돌아와 있습니다.
전에 인도에 갔을 때입니다.
그때 라자스탄 자이살메르에서 타르 사막을 건널 때였지요. 우리는 모두 낙타를 탔는데 거의 여섯 시간의 사막 횡단 중에 외딴집을 만났습니다. 나는 안내자에게 그 외딴집에 좀 들렀다 가겠다는 부탁을 했지요. 그 외딴집은 인도의 하위 계층인 천민들의 주거지였습니다.그들을 만지면 죽어 다음 세상에 천민으로 태어난다는 글을 읽기는 했지만 그들을 만나 손이라도 잡아주고 싶었습니다. 내 말에 고개를 젓던 안내자가 허락을 해 주었습니다. 나는 낙타의 고삐를 바투잡고 방향을 틀었지요. 그런데 문제는 낙타였습니다. 낙타는 열 걸음 정도 대열에서 벗어나더니 다시 대열 쪽으로 돌아섭니다. 나는 몇 번이나 방향을 바꾸어 보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낙타는 절대로 대열을 이탈하지 않습니다.”
안내자는 그럴 줄 알았다며 웃습니다.나는 지금도 가던 길을 바꾸다가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오는 나를 볼 때면 타르 사막을 건너던 그 낙타를 생각합니다. 어쩌면 나도 대열을 벗어나길 두려워하는 낙타입니다. 사실 새 길을 가보려고 내 안에서는 바둥대지만 내 발은 오랜 관습대로 가던 길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낙타와 다를 게 없는 나입니다.
2013년에도 또 4월이 왔습니다.
그런데 4월이 4월이 아닙니다. 3월 30일인 일요일에 주말농장에 가 감자를 심어놓고 왔는데, 어찌 된게 그 후로 두 번이나 눈이 왔습니다. 조금 온 눈이어도 눈과 함께 찾아온 추위는 겨울추위를 능가합니다.
엊그제는 바깥에 나갈 때 겨울장갑을 꼈습니다. 마스크도 했습니다. 물론 옷도 겨울옷을 입었습니다. 그러고 바깥에 나갔는데 목에 감던 손수건을 가지고 나오지 않은 걸 후회했습니다. 서울대에서 듣는 강의가 끝나자마자 곧바로 집으로 왔습니다. 날도 음침하고 흐린데다 몰아치는 바람마저 무서웠습니다.
겨울에서 봄으로, 계절 바뀌는 일이 이렇게 험난합니다. 저만큼 가던 겨울이 그냥 가버리지 못하고 계속 머뭇거립니다. 가던 발걸음을 되돌려 오기도 합니다. 이쪽 도심으로 들어오는 봄도 마찬가지입니다. 성큼 들어서기는 했어도 겨울이 놀던 자리를 덥썩 차고앉지 못하네요. 뒤로 물러앉았다가 말았다가 합니다. 계절 바뀌는 일이 이렇게 힘이 듭니다. 따스하다가 냉랭하다가. 마치 부부 사이 같이 종잡을 수 없습니다.
해마다 오는 봄도 이러한데 사람의 마음을 새롭게 바꾸는 일은 또 얼마나 어려울까요.
집에 돌아와 아파트 울담 곁에 선 살구나무를 내다봅니다. 곧 꽃이 필 것 같이 빨갛던 나뭇가지가 아직도 그대로입니다. 그렇지만 가만히 보면 그대로는 아닙니다. 하얀 꽃이 한두 개씩 피고 있습니다. 한송이 한송이 몰래 꽃을 터뜨리는 살구꽃을 내다보고 있을 때입니다. 휴대폰에 문자가 도착했습니다. 열어보니 저작권협회입니다. 모 은행 본점 건물 외벽에 저의 동시 ‘4월이 오면’을 걸겠다는 문자입니다. 그러니 동의를 해 달라는 겁니다.
오, 4월이 오면
좀 산뜻해져야지.
참나무 가지에 새로 돋는 속잎같이.
이 마지막 연만 앞으로 석달 동안 걸겠답니다.
누구나 4월 앞에 서면 좀 산뜻해지고 싶을 테지요. 들풀도 나무들도 그렇겠지요. 마치 참나무 가지에 새로 돋는 속잎 같이 그렇게 달라지고 싶겠지요.
나는 얼른 그렇게 하라고 동의를 해 주었습니다. 산뜻하게 살고 싶어도 그래지지 않는 이들의 무거운 마음을 내 시로 덜어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솜사탕처럼 벙그는
살구꽃 같이
나도 좀 꿈에 젖어
부풀어 봐야지.
그러고 보니 이 연도 참 좋은 데, 하는 생각도 듭니다.
모두들 꿈이 없이 사는 세상입니다. 젊은이들에게 꿈이 뭐냐고 물으면 한결같이 ‘취직’이라고 합니다. 사는 게 팍팍해서 꿈을 갖기조차 사치스럽게 느껴지는 게 오늘의 젊은이들이 맞닥뜨린 현실입니다. 안정된 직장을 얻어 돈을 버는 게 제일 우선인 시대가 됐습니다.
이런 때에 꽃샘추위를 뻔히 알면서도 연약한 꽃몽오리 속에 꿈을 키우는 4월을 배우고 싶습니다. 이 꽃샘추위가 끝나면 분명히 화창한 봄이 올 테지요. 그때가 오면 아는 사람들에게 좀 전화를 걸어 겨울을 나느라 못 보았던 얼굴을 보자고 해야겠네요. 깊게 악수를 하고 그들의 등을 툭툭 두드려 주고 싶네요. 겨울 강을 무사히 건너온 감회를 이야기하며 못 먹은 탁주도 한잔 했으면 좋겠습니다.
창밖의 살구나무를 또 한번 내다봅니다.
바깥 꽃샘추위와 상관없이 희끗희끗 꽃이 피고 있습니다. 봄이 다 왔다는 뜻입니다. 이제 나도 ‘참나무 가지에 새로 돋는 속잎같이’ 좀 산뜻해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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