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안성 나들이

권영상 2013. 4. 9. 17:53

안성 나들이

권영상

 

 

 

 

 

안성에 다녀오는 길이다.

산수유 핀 농가를 지나는 데 파를 거둔다. 괜히 산수유 노랗게 핀 그 집이 고향집처럼 느껴진다. 나는 차를 세우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검정 점퍼 차림의 육십 대 노인이 파를 캐고 있다. 텃밭에 실궂한 파가 세 이랑이나 있었다.

“대파 빛깔이 참 좋습니다.”

나는 인사삼아 허리를 굽혔다.

“아, 노지에서 겨울을 났으니 좋잖구요.”

가만히 보니 드문드문 파꽃 몽오리가 맺혀있다. 가을 대파는 무른데, 삼동을 난 대파라 그런지 팽팽하다. 검푸른 빛이 오히려 초록으로 변하고 있다. 엊그제 비가 온 뒤라선지 한 발 들어선 밭도 무르고, 대파 빛깔도 부드러운 봄빛이다.

 

 

“씨 받을 거 몇 개 두고 내다팔려고 그런다우.”

머리에 아직도 털모자를 쓴 노인이 나를 보고 대거리를 한다.

“그럼, 제게도 좀 파시지요.”

괜히 파를 사 가고 싶었다. 파씨를 받겠다는 노인의 말에 나도 모르게 정서가 감염된 것 같았다.

예전에 보면 아버지도 뜰앞 텃밭에 파씨를 얻으실 요량으로 가을 파를 그냥 두셨다. 봄이 되어 파꽃이 피고 파씨가 여물 때쯤이면 통째 뽑아 담장 위에 올려두셨다. 그러다가 어느 때쯤 파꽃 대가리를 잘라 씨를 받으셨다. 파씨. 작지만 분꽃씨처럼 새까맣다. 그걸 마루 위에 신문지를 깔고 볕에 말리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파꽃 부스러기들에 섞여 바짝바짝 말라가던 파씨를 해 가는 줄 모르고 지켜보던 때가 있었다.

 

 

“파를 사 가신다고?”

노인이 물었다.

“네. 먹기도 하고 저도 파씨 좀 받아보겠습니다.”

내 말에 노인은 호미를 놓고 뽑아놓은 파를 추슬러 끈으로 묶었다. 그러더니 ‘파씨도 받아보겠다니.’ 그러며 그 곁에 있는 파를 또 몇 움큼 더 주셨다. 주신 파만도 한 아름은 되었다.

“심을 데는 있수?”

꽤 많은 파를 내게 건네시며 노인이 물었다.

“베란다에 심어보려구요.”

나는 멋쩍게 대답하며 파값을 치르고 나왔다.

차 뒷자리에 파 묶음을 두고 시동을 걸었다. 달릴 때마다 뒷자리에서 싱그러운 파 냄새가 슬쩍슬쩍 난다.

 

 

 

오다가 백암 시장에 들렀다. 길에 나와 앉은 할머니 앞에 무가 있다. 무순이 노랗게 나온 무 세 개를 샀다. 어두운 창고에서 이 무가 겨울을 났겠다. 배추 고갱이처럼 노란 무순 빛깔이 곱다 못해 앙증맞도록 정이 든다. 봄은 확실히 빛깔의 계절이다. 파란 대파도 빛깔이 좋지만 노란 무순도 빛깔이 좋다.

 

무도 봄에 뜰앞 텃밭에 심어두면 꽃이 핀다. 잎을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씨를 받기 위해서다. 꽤 키가 큰다. 하늘하늘한 가지 끝에 보랏빛 도는 하얀 꽃을 적잖이 피운다. 하얀 무 꽃잎은 깨끗하고 청초하다.

뽀얀 들판 너머에서 오는 아침이 지나면 나비들이 무꽃 둘레로 날아든다. 하얀 무꽃에 하얀 나비. 푸석푸석한 들판의 노오란 민들레꽃을 징검다리 삼아 날아온 나비들은 이르게 핀 무꽃이 반갑다. 

 

 

무꽃이 피고 나비가 날아들 때면 들판 파란 보리밭에선 종달새가 공중으로 날아올라 뱃종거리며 울었다. 그럴 때에 올려다보던 봄아침 하늘은 푸를 대로 푸르러 있다. 바닷물처럼 파란 하늘에 날아올라 소리치던 종다리는 다 어디로 가고 없는지.

이쪽 우체국 앞길에는 할머니 두 분이 봄쑥을 가지고 나왔다. 봄쑥도 한 봉지 샀다. 안성 집 앞 바위 틈 억서리에 지난해 큰 마른 쑥대궁이가 길길이 서 있었다. 그걸 뽑아내고 나무 몇 그루 심느라 한나절을 보냈다. 그때 쑥대궁이 밑에 햇쑥이 뽀얗게 나 있었다. 그때는 그걸 캐어올 생각을 못했는데 다듬어 내온 봄쑥을 보니 사고 싶다.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다가 살 찐 뽀얀 봄쑥 한 봉지를 사고 말았다.

 

집에 오니 강릉에 내려간 아내가 나보다 늦다.

나는 베란다 빈 화분 두 개에 파를 그냥 모둠으로 넣고는 둘레에 흙을 덮었다. 손을 씻고 나와 심은 파를 보니 마치 베란다가 산수유 핀 농가의 뜰앞 같다. 파랗고 싱그러운 파. 작년에는 슈퍼에서 사온 파를 여기다 심어놓고 필요할 때 썼다. 라면에 넣어먹거나 파간장을 만들 때 썼다. 그러고 남겨둔 포기에서 파꽃이 피었다. 그러나 씨앗은 맺히지 않았다. 그냥 푸석푸석 하더니만 말라버리고 말았다. 그 아쉬운 생각 때문에 무순이 나온 무 한 개도 화분에 심었다. 물을 넉넉히 주었다.

 

 

 

집안 정리를 좀 하다가 궁금해 베란다에 또 나갔다. 난데없는 지렁이다. 빨간 지렁이 한 마리가 베란다 타일 바닥을 긴다. 아마 화분에 그득히 준 물 때문에 기어나온 모양이다. 이런 일이 가끔 가끔 있었다.

어쩌자고 그러는지 지렁이는 화분과 거리가 먼 방향으로 기어간다. 타일과 타일 사이에 패인 홈을 두고 물기가 적은 타일 위를 간다.

대체 저 놈은 어느 방향으로 가려고 저러는지.

지렁이는 빨갛고 여린 긴 몸을 꼼지락거리며 앞으로 이동한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그의 몸은 볕을 받아 보랏빛으로 반짝인다. 지렁이는 그런 신비한 빛깔의 몸으로 화분 바깥 세상의 봄을 잠시나마 누린다. 그러나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방향엔 몸을 가릴 데라곤 없다. 화분도 없고, 그냥 판한 바닥이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고난을 치를 방향으로 간다.

 

 

“이쪽으로 가렴.”

나는 타일과 타일 사이의 홈이 패인 곳으로 방향을 바꾸어준다. 그쪽이라면 타고 오를 화분도 있고 타일 사이의 고인 물기를 이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렁이는 고집스럽게 제가 가던 그 방향으로 다시 몸을 튼다. 높은 시야를 가진 내가 보기엔 그곳은 가서는 안 될 방향이다. 그런데도 지렁이는 그야말로 아직 세상을 모르는 아이처럼 고집을 피운다.

가끔 화분에 물을 흠뻑 주고나면 바닥에 지렁이가 기어나오곤 했다. 또 죽은 지렁이도 가끔 보았다. 엉뚱한 방향으로 자꾸 가는 지렁이를 보다가 나는 그만 돌아섰다.

딸아이에게 내가 저러했다.

 

 

나는 내가 내려다 보는 시야를 가지고 딸아이가 가려는 방향에 끼어들었다. 그 방향은 멀리 돌아가는 길이야! 그 일은 먹고사는 데 도움이 안 돼! 그 길은 험난한 길이라구! 그러며 딸아이가 가는 방향을 틀어보려 했었다. 내가 암만 이쪽 방향으로 그를 돌려세워도 다음 날이면 그는 그가 원하던 그 방향으로 돌아서 있었다.

새로 인생을 시작하는 젊은이에겐 험난한 길에 대한 경험이 필요하다. 그가 가는 길이 평탄하고, 쉽고, 단조롭다면 그건 좋은 길이 아니다.

 

 

나는 뒷베란다에 나가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4월 봄하늘을 쳐다봤다. 저 하늘 위에서 나를 내려다 보는 분이 있다면 그분 보시기에 오늘 내가 달려온 방향은 어떠하였을까. 제대로 된 방향으로 지금 나는 가고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