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젠틀맨, 알랑가몰라 왜 미끈해야하는건지

권영상 2013. 4. 15. 13:57

젠틀맨, 알랑가몰라 왜 미끈해야하는건지

권영상

 

 

 

 

 

어제다.

북한산 둘레길을 돌아오다 동행하던 이들끼리 술 한잔을 했다. 한잔이 아니고 대취 직전까지 갔다. 그런 아리까리한 지경에서 자, 이제 그만! 하고 헤어질 수 있는 위인이 있을 수 없다. 우리는 그 동네 빌딩 중에서 가장 높은 빌딩의 가장 높은 층의 술집을 찾아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싸이 비디오 발표했어?”

누군가가 물었다. 누군가가 응, 했다. 누군가가 그 중요한 시간을 놓친 걸 한탄한다. 술에 취한 누군가가 엘리베이터의 기둥을 잡고 엉덩이 춤을 춘다. ‘알랑가 몰라. 왜 미끈해야 하는건지. 알랑가 몰라. 왜 쌔끈해야 하는건지 알랑가몰라.’ 우리는 엘리베이터가 맨 꼭대기로 올라갈 때까지 엉덩이를 흔들고 춤을 췄다. 우린 취했거든.

 

 

집에 돌아온 다음 날 아침, 인터넷에서 비디오를 찾았다.

싸이의 비디오를 볼 때면 늘 나는 나의 상상력을 한탄한다. 나는 왜 젊은 그들처럼 기발하지 못할까. 나는 왜 그들처럼 발칙하지 못할까. 나는 왜 자꾸 나이값을 하려할까. 나는 왜 지난 날의 답답한 형식 안에서 배불리 살려고나 할까. 나는 왜 싸이를 들으면 ‘이것도 노래야?’ 그런 말을 할까말까 할까. 나는 왜 싸이의 섹시한 비디오를 보면 나도 모르게 ‘쟤들 정신 나갔어!’ 그렇게 소리치려 할까. 나는 그들의 발랄발랄을 보면 요새 애들 버릇없어, 그런 군소리를 하려 한다.

 

 

“알랑가몰라 왜 미끈해야하는건지/ 알랑가몰라 왜 쌔끈해야하는건지/ 알랑가몰라 달링 빨리와서 난리해/ 알랑가몰라 난리난리 났어 빨리해.....”

 

뮤직비디오가 열리자, 언덕 너머에서 간장종지 썬그라스를 낀 젠틀맨이 올라온다. 잔뜩 겉멋에 사로잡힌 젠틀맨이 길가에 세워둔 ‘주차금지’를 냅다 걷어찬다. 주차금지, 그건 누군가가 세워놓은 권력이다. 점잖은 척, 도덕군자인 척, 양심적인 척의 대명사인 젠틀맨은 제 몸 안에 숨겨둔 나쁜 손을 꺼내 마네킹의 볼록한 가슴을 쓱 만진다. 마치 단축키를 몰라 키보드를 마구마구 눌러대듯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나쁜 손으로 마구마구 누른다. 한손 가득 구린 방귀를 움켜 여자 친구의 입안에 밀어넣는 젠틀맨의 이중성은 쾌하다. 재미있다.

 

 

 

누군가의 감추어진 뒷모습을 보는 건 그래서 즐겁다. 신호대가 출발과 정지를 알려주는 쇠기둥이 아니라 섹스샵의 폴대가 될 수 있어 젠틀맨은 좋다. 수캐처럼 사타구니를 마구마구 비벼댈 수 있으니까. 예쁘고 잘 생긴 여자의 허리 다리 종아리 좀 보면 어때! 가래떡으로 목도리 좀 하면 어떻고 그걸로 멋 좀 내면 뭐 어때! 젠틀 젠틀하는 젠틀맨은 딱 싫어. 밥맛이야. 양복에 넥타이, 그게 최선의 패션인 양 점잖빼는 젠틀맨은 너무너무 싫어. 보일락말락하는 치마 걷어올려보고 싶고, 브래지어 끈 탁 풀어보고 싶고, 나이에 맞지 않는 섹시춤 뚜까뚜까 좀 추어보고 싶다.

 

 

알랑가몰라.

가사가 혀끝을 타고 팍팍 쏟아져 나오지 않는다면 알랑가몰라만 외쳐도 노래가 다 된다. 알랑가몰라 대신 할랑가몰라, 잘랑가몰라, 줄랑가몰라를 소리친대도 절묘하다.

사람들은 가끔 젠틀맨이 죽도록 싫을 때가 있다. 젠틀맨은 전통적으로 남성들의 우위에 있는 부류의 인간들이다. 그들은 인간과 사회를 짓누르고 업악하고 통제해온 가장 진부한 문화이며 권력이다. 젠틀맨은 무너뜨려야할 민중들의 낡고 고루한 타킷이다. 젠틀맨이 똥구멍 찢어진 바지를 입거나, 남대문 열린 바지를 입거나, 자켓 밑에 팬츠를 입거나, 칼힐을 신어준다면 넘넘 좋겠다. 골목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거나 하수구에 한번쯤 콱 빠져준다면 더욱 좋겠다.

 

 

음악은 이미 듣는 음악이 아니다. 듣는 음악이어야 한다고 계속 고집 부린다면 그 또한 청각의 권위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류다. 지금의 대중음악은 테크놀로지와 음악과 비디오가 결합되어 독자와 만난다.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과거에는 무대에서 노래 부르던 가수가 지금은 무대에서 내려와 제 노래에 맞추어 청중과 호흡하며 춤을 춘다. 들어주기만 하던 청중이나 일상의 구조물들조차 음악 속에 능동적으로 들어선다. 젠틀맨은 그런 다양한 음악적 환경들과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좀더 음악적 완성을 기대한다면 그것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더 즐겁고 재미있으려면, 아니 더 기존 전통 음악적 질서를 깨뜨리기 위해서라면 하나 더 첨가되어야 할 것이 있다. 소음이다. 소음이라는 음원이 첨가될 때 뮤직비디오는 더 일상과 가까운 쪽으로 다가가 공감력을 높일 수 있다.

소음은 음악에서 오랫동안 무시되고 소외되어 온 음원이다. 길거리에서 난데없이 날아드는 클랙션, 깡통 구르는 소리, ‘울릉도 오징어가 왔십네다’나 텔레비전 잡음, 격발되는 방아쇠 소리.... 이러한 소음의 첨가야말로 폭넓은 경험을 통해 더 다양하게 이 음악을 읽어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었을 것이다.

 

 

 

I’m a mother father gentleman.

섹시하고 저속한 욕설들. 그 반복되는 이면에 숨겨진 기성품 같이 구태한 형식의 인간, 젠틀맨!

젠틀맨에 대한 야유가 무엇보다 속시원하다. 우리는 살아오며 장구한 시간 동안 젠틀맨의 허위과 과장과 나쁜 권위에 끄달리며 살아왔다. 그 오래된 권위를 '젠틀맨'은 반어적 방식으로 비틀고 조롱하고 비아냥댄다. 그점에서 ‘젠틀맨’은 음악의 기능뿐 아니라 사회적 기능도 분명히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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