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 탄 장미’를 기다리는 오늘의 청년들
권영상
오래 글을 쓰며 살다보니 자연스레 여성 편집자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그분들 중엔 혼기를 훌쩍 넘긴 미혼자들이 꽤 있다. 출판 일로 만나 같이 밥을 먹거나 커피를 마실 때면 나도 모르게 권하는 말이 있다.
“그래도 결혼 안 하는 것보단 하시는 게 나을텐데.”
그 말을 해놓고 나는 긴장한다. 미혼자에게 그런 말하면 교도소에 잡혀갈 만큼 커도 큰 실례라 한다. 그래도 어떨 때는 그들이 딸아이 같아 무례를 무릅쓰고 물어볼 때가 있다. 나이 먹은 사람이 그런 것도 물어보지 않는다면 그건 나이 헛먹은 거다. 오히려 나이 먹어가지고 그런 것도 안 물어보는 사람이 얄밉다. 안 그런가.
내 말에 여간해 입을 열 것 같지 않다가도 “중매도 좋잖아요?” 하면 쩝, 하고 쓴 입을 다시다가 말문을 연다.
“요즘 남자들 보통 아니에요.”
그러며 혀를 내두른다.
그가 말하는 요즘 남자들이란 아직 결혼하지 않은 남성이다.
“중매로 사람을 만나면 보통 이런 거부터 물어보잖아요. 요즘 어떤 책을 주로 읽느냐? 영화는 어떤 영화를 좋아하느냐? 취미는 뭐냐? 이런 것부터 서로 질문하면서 상대에게 차츰차츰 접근해 나가야 하잖아요.”
“그야 그렇지요.”
그건 당연한 상식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에요. 골프는 치러 다니느냐? 차종은 뭐냐? 혼자 사는 오피스텔이 있느냐 없느냐? 이런 것부터 묻는 거에요. 요즘 남자들 너무 심한 것 같지 않아요?”
그 말을 듣자, 나는 갑자기 내가 남자인게 창피스러웠다.
그 질문이 자신에게 충족 되고나면 그때부터 어떤 영화를 좋아하느냐, 취미는 뭐냐로 이야기가 전개 된다는 거다.
내가 그런 일에서 멀리 떨어져 나이를 먹는 동안 세상이 변해도 엄청 변한 모양이다. 하긴 요즘 젊은이들은 연상의 여성은 물론 이혼 경험이 있는 여성에게도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신문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상대가 경제적으로 모든 걸 갖추어 놓았기 때문이란다. 왜 젊은 청년들의, 배우자를 선택하는 여성관이 이렇게 변화했을까. 팍팍한 현실 때문만일까.
옛날, 아주 먼 옛날에 한 공주가 살았단다. 그는 어렸을 때 울기를 자주 해 임금님이 가끔 야단을 쳤지.
“자꾸 울면 바보 온달에게 시집 보낼 테다.”
그러면 공주는 울음을 뚝 그쳤지.
장터에는 맨발로, 해진 옷을 입은 채 나무를 팔러오는 바보녀석이 있었거든. 그 말을 들은 공주는 바보 온달이 무서워 그만 울음을 그치곤 했었지. 그렇게 얼마만큼의 세월이 지난 뒤 나이가 차자 임금님은 공주에게 늠름하고 총명한 총각과 결혼하길 권했어.
“싫어요. 저는 온달에게 시집가겠어요.”
공주는 끝내 아버지의 권유를 물리치고 산골짜기 바보 온달을 찾아갔단다. 가서는 온달에게 청혼을 하고 마침내 결혼도 했지. 그 산골짜기에서 뭘 먹고 살았느냐고? 궁궐에서 가져간 금팔찌가 있었지. 그걸 팔아 논밭도 사고, 번듯한 집도 짓고, 노비도 들이고, 말도 사고, 소도 샀지. 그러고는 바보 남편을 잘 키워 임금님의 어엿한 사위가 되게 했단다. 사위만 되게 했느냐? 아니지. 훌륭한 장수도 되게 하였지.
그 여성 편집자의 말을 듣는 순간, 이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가 떠올랐다.
이런 이야기를 손자들에게 들려주는 전승자는 대부분이 할머니다. 긴 긴 겨울밤, 저녁밥을 먹고난 빈 자리에 할머니와 어린 손자 손녀가 화롯불에 둘러앉는다. 옛날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는 이 손자들에게 할머니는 편안한 목소리로 이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야기를 듣는 청자들은 무료한 시간, 할머니의 이 따뜻한 이야기를 들으며 또랑또랑 눈망울을 굴리거나 아니면 잠에 빠져들 거다. 또랑또랑 눈망울을 굴리며 이 이야기를 들은 손녀는 무얼 생각할까. 사내아이보다 상대적으로 우월한 여성 의식을 가지게 될 것 같다. 이야기를 듣는 순간, 같은 여성인 자신이 이야깃속 주인공인 공주가 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도 평강공주처럼 인생을 자기 주도적으로 살겠다는 능동적 의식을 싹틔울 것이다.
그런가 하면 할머니 무릎에서 벌써 쌕쌕 잠드는 손자는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어쩌면 자신을 찾아와 결혼을 해달라고 목매는 한 공주를 꿈 속에서 만나고 있을지 모른다. 아니면 공주를 찾아 온 세상을 헤매다니다가 그만 폭삭 늙어버린 자신을 발견하고 슬퍼할 지도 모른다. 손자는 자라면서 자신의 인생을 자기 스스로 일구어 나가려 하기보다 여성의 작용에 의해 자신이 발전되기를 기대하며 살 것이다.
산골에 사는, 눈먼 어머니와 가진 거라고 하나 없는 가난한 나무꾼에게 불쑥 나타난 평강공주는 호박이다. 호박도 호박도 이런 호박이 없다. 호박도 아주 넝쿨째 굴러들어온 호박이다. 아니 호박 정도가 아니다. 1등 당첨된 로또복권이라고 이럴까. 예기치 못하게도 하늘이 내려준 횡재다. 재물만 한꺼번에 왕창 내려받은 게 아니다. 권세를 부리며 살수 있는 평생 직장까지 얻는다. 자신의 인생은 물론이요, 대대로 물려받은 빈한을 한꺼번에 역전시켜주는 귀인이다.
가난한 하층민에게 이 정도의 횡재는 가끔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게 묻는다면 나는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런 행운 없이 이 풍진 세상을 살아가라면 그건 지옥살림이나 다를 게 없다. 그러나 아직 옛날이야기를 듣는 청자는 모든 걸 그대로 수용하는 어린 아이들이다. 그들이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밤마다 이 이야기를 듣는다면 그들의 의식속에는 ‘백마 타고 오는 장미’가 서서히 들어앉게 될 것은 뻔하다.
또 하나. 이 이야기를 전승하는 화자는 누구인가? 여성인 할머니다. 할머니는 여성이기 때문에 옛날에 한 부잣집 청년이 있었는데 그가 한 가난한 여자에게 청혼을 하여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는 피할 것이다. 더구나 당대 사회가 남성에 의해 움직이던 사회이다 보니 그런 구조의 이야기는 너무나 뻔한 결말을 이끌어낼 수도 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할머니는 예쁜 공주가 한 가난한 총각과 결혼하여, 식의 이야기를 더 선호하게 될 것이다.
이런 식의 스토리는 ‘평강공주와 온달’ 말고도 유사한 ‘선화공주와 서동’이 있다. ‘우렁각시’와 ‘나무꾼과 선녀’, ‘막내딸과 숯구이 총각’ 등이 있다. 우리나라 사람이면 누구나 선호하는 옛날 이야기들이다.
이 이야기들은 어린 사내아이들에게 결혼할 상대 여성에 대한 기준을 알게 모르게 제공한다. 이 이야기가 말하는 괜찮은 여성은 첫째, 높은 신분의 배경을 가진, 뼈대 있는 집안의 여자다. 둘째는 ‘금팔찌’나 ‘순금 한 말’, ‘금 한 덩이’ 정도의 부를 갖춘 여자다. 마지막으로 셋째는 당당한 재능을 가진 여자다. 평강공주가 온달을 장수로 만들어내는 것이며, 선화공주가 서동을 무왕이 되게 하는 것, 우렁각시가 농사꾼 남편을 임금자리에 앉히는 거며, 막내딸의 금덩이를 판별해 낼 줄 아는 재능이 그걸 뒷받침한다.
어느 날, 아버지가 막내딸에게 묻는다.
“너는 누구 덕에 먹고 사느냐?”
그러자 막내딸은 “제 복에 먹고 살지요.” 라고 대답한다. 아버지에게 있어 이 말대답은 여간 당돌하고 잔망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막내딸은 자신의 존재감을 분명히 어필한다. 그 바람에 막내딸은 집에서 쫓겨난다. 그 후, 그녀는 산골짜기 숯쟁이 총각과 결혼하여 그 집 숯가마에서 누구도 못 본 금덩이를 발견해낸다. 그리고 잘 먹고 살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는 사내아이는 알게 모르게 결혼할 상대 여성에 대한 기준을 갖게 된다. 배경, 부, 재능이 그것이다. 이것은 당대 젊은 남성들의 여성을 바라보는 기준이 되었으며, ‘백마 탄 장미’가 어느 날 자신에게 찾아와 주길 바라는 그리움이 되기도 했을 거다.
조선 인조 연간에 박씨부인이 있었는데, 서울 사는 이시백과 혼인을 하였다. 얼굴이 박색이라 가족에게 박대를 당하였다. 박씨부인의 신묘한 솜씨로 시백은 과거에 장원급제 한다. 하늘의 때가 되자, 금강산에 사는 박씨부인의 아버지 박처사가 서울로 올라와 도술로 박씨부인의 허물을 벗기니 그의 얼굴 또한 미인이도다. 그 후, 시백은 박씨부인의 덕을 입어 높은 벼슬자리에 오른다.
이 대강의 이야기가 <박씨부인뎐>이다.
이 이야기에 나타나는 여성에 대한 기준은 앞과 좀 다르다. 무엇보다 여자가 남자의 사회 진출에 기여해 주기는 바라는 능력을 첫째로 손꼽는다. 둘째는, 여자의 집안은 무엇이든 못할 것 없는 무소불위의 배경을 가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뭐니뭐니 해도 여성은 얼굴이다. 얼굴이 예뻐야 한다는 점이다. 능력, 배경, 얼굴로 그 기준이 변했다. 오늘 날 우리 사회가 여성을 바라보는 통속적 기대치와 크게 다를 바 없다는 것에 놀랍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들을 보면 아주 오랫적부터 남성들은 여성에게 배경, 재능, 부, 예쁜 얼굴을 지속적으로 요구해 왔다. 그런 이유로 여성은 남성의 요구 충족을 위해 끊임없이 진화했다. 그 결과 여성은 점점 자신의 인생을 적극적으로 주도해 왔고, 남성은 소극적으로 현실에 안주하며 살았다.
그 결과 조선은 어떠했는가.
나라 안에선 끊임없이 붕당을 조성해 싸움에 몰두했고, 두 차례의 큰 전란과 국지전에 시달렸다. 이 모두 조선의 소극적 남성들이 빚어낸 결과다. 이때로부터, 즉 임병양란을 거치면서 조선 남자들의 기세는 꺾여나갔다. 그리고 오늘날, 남성들은 자신들이 천년 만년 누릴 줄 알았던 자리를 서서히 여성들에게 내주기 시작했다.
그 속에 나도 있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모임에서 "놀러 가자" 그러면 나는 철썩 같이 응한다. 그래놓고는 다음 날 “집사람 말로 그날 집안 행사가 있다네." 그러며 둘러댄다. 생명보험 하나 들어보라고 아는 이가 권유하면 “집사람한테 물어보고.” 그런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새 차를 뽑을 때면 차종은 아내가 결정한다. 이사갈 집도 아내가 결정하고, 아이가 다닐 학원은 물론 강의 과목이며, 내가 입을 옷조차 아내가 결정하고, 내가 맬 넥타이도 아내가 선택한다. 이 모두 아내의 결정이 가장 옳다는 남성들의 소극성의 발로 때문은 아닐까.
이걸 학습하며 자란 우리의 아들들은 결혼할 여성을 위대한 여자에서 찾으려 한다. 그러기에 맞선 자리에서 여자를 만나면 창피한 줄도 모르고 묻는다.
“골프 회원권은 있나요? 차종은 뭐지요? 오피스텔 키는요?”
따지고 보면 청년들이 하루 아침에 이토록 나약해진 게 아니다. 다 길고긴 역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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