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비평

옛날에 옛날에 옛날이야기

권영상 2013. 3. 10. 19:49

 

옛날에 옛날에 옛날이야기 

권영상

 

 

 

 

“옛날에 옛날에 임금이 백성을 짓누르던 시절이었어.”

옛날이란 말만 꺼내도 아이들은 좋아했다. 언제? 옛날에. 내가 처음 교직에 발을 들여놓던 70년대 후반. 그때 아이들은 멀쩡히 공부를 하다가도 뭔 말만 나오면 옛날이야기 하나 해달라며 졸랐다.

“안 돼! 공부 시간에 뚱딴지 같이 옛날이야기는 무슨!”

그래 보지만 한번 떼를 쓰는 아이들을 이겨낼 장사는 없다.

“그래. 좋아.”

이래야만 아이들 뻗대는 마음을 달랠 수 있다.

 

 

“옛날에 말이야.”

그렇게 운을 떼면 졸던 애들도 깨었고, 뒤에서 빗자루를 들고 장난을 하던 애들도 정색을 하며 제 자리에 와 앉았다. 턱을 괴고 앉거나, 흐트러졌던 몸매무새를 바로 했다. 하여튼 그 무렵의 아이들은 요즘 아이들과 달리 그런 순진한데가 있었다.

“그래서요? 선생님!”

내가 조금만 딴청을 부린다 싶으면 아이들은 나를 재촉했다. 어떤 계집아이들은 윗몸을 뒤흔들며 얼른 들려달라고 성화를 댄다.

“옛날 옛날에 말이다.”

얼른 말을 이어가지 않으면 또 난리다.

“그래서 옛날에 어떻게 됐어요?”

 

 

“그런 시절에 말이다. 지리산에 사는 한 착한 부부에게 아기 하나가 툭 태어났어. 아기가 태어나면 탯줄을 잘라야 하잖아. 탯줄, 그치?”

그러면 애들은 “맞아요. 가위로 잘라야 해요.” 아는 애들은 그런다. 농경시대에는 가위보다 낫으로 잘랐다.

“아, 그런데 가위로 잘라도 안 돼. 낫으로 잘라도 안 돼. 그래서 작두 알지? 풀 써는 작두로 잘라봤는데 그걸로도 안 돼. 그래 억새풀을 한 움큼 베어와 탁! 치니 탯줄이 뚝 잘리는 거야. 그래, 아기 이름을 뭐라 지었나 하면 우투리, 우투리라 지었어.”

우투리가 뭔 뜻이냐고 물어볼 만도 한 데 아무도 안 묻는다. 그냥 아기 이름이 우투리라 하면 그만이다. 옛날이야기도 그 구조가 소설 형식이라 다 듣고 핵심을 알면 되지 소소한 곁다리를 붙잡고 늘어지면 옆의 애들한데 욕먹는다.

 

 

“근데 이상한 일도 다 있지.”

“뭐가요?”

“우투리를 방바닥에다 재워놓고 일 갔다오면 아, 이눔이 선반 위에 떡 올라가 있네. 같이 자다 눈 떠 보면 또 장롱 위에 떡 올라가 있고.”

“그래서요?”

“하도 신기해서 부부는 밭에 가는 척하고는 문에 구멍을 뚫어살곰히 들여다 봤지. 그랬더니 이눔이 아, 방안을 훨훨 날아댕기는 거야.”

“우투리가 날아댕겨요?”

“그래. 날아댕기는 거야. 부부도 그게 몹시 궁금해 방에 들어와 이눔 팔을 들어보니 아, 글쎄 저드랑에 날개가 있능기라. 아쿠마, 이거 큰일났다며 부부가 안절부절 못했겠지?”

 

 

“왜요?”

“보통 아가 아니니까네. 나라 임금이 저보다 힘센 아를 낳았다면 가만 두나? 안 두지. 그래 가지고 부부는 우쩌튼 아 잃을까봐 뒷산에 갔다 슬쩍 숨겨놓았지. 근데 아니나 다를까 임금이 이 소문을 듣고 병사들을 보냈어. 왜냐? 잡아들일라고. 그런데 와 보니 아가 없네. 어데 감췄냐고 물으니 아 잃을까봐 대답하나? 안 하지. 그래 그만 우투리 엄마 아빠만 실컷 두둘겨 패주고는 가버렸어. 이 사실을 안 우투리가 집으로 돌아와 지 엄마 보고 콩 한 말을 볶아달라고 했어.”

“콩은 뭐하려고요?”

“어, 먹을라고 그런게 아니라 볶은 콩으로 갑옷을 만들리고 그랬지. 왜냐하면 저를 잡으러 또 올 거라는 거 다 아니까. 우투리가 누구냐? 보통 아가 아니잖아. 그러니 다 알지.”

“암만 그래도 그렇지. 웃기다! 콩 갑옷을 입고 싸우려고요?”

“그래. 볶은 콩 갑옷. 우투리 엄마가 우투리 말대로 솥에다 콩을 볶는데 볶는 중에 콩 한 알이 툭 튀어나와. 그래 아무 생각없이 그냥 넙죽 주워 먹었어. 우쨌거나 그렇게 해 가지고 만든 콩갑옷을 입고 임금의 병사들과 싸웠는데 그만 활에 맞아 죽었어.”

“왜요? 콩갑옷 입었는데 왜 죽어요?”

 

 

 

“어. 그건 엄마가 넙죽 먹은 콩 한 알 있지? 그것 때문에 겨드랑이 갑옷에 딱 한 알이 비게 되었는데 화살이 바로 거기에 탁 맞은 거야. 그래서 죽은 거지. 우투리를 죽여놓고 병사들이 돌아가자, 우투리 아빠는 콩 서되, 좁쌀 서 되, 팥 서되와 함께 묻어 우투리를 뒷산에 고이 장사 지내주었지.”

“어, 이상하다. 옛날이야기에 주인공은 잘 안 죽는데!”

그때 누가 아는 척 한다.

“옛날이야기니까 죽어도 이따 또 살아나겠지.”

누가 또 옛날이야기의 약점을 콕 집어낸다.

 

 

“임금은 우투리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도 불안했던 거야. 왜냐? 임금은 제 앉은 자리가 늘 불안하거든. 특히 나쁜 임금일수록에. 이번엔 임금이 직접  칼을 들고 우투리 집으로 찾아온 거야. 그래 가지고 “우투리 무덤 있는 데를 대라!”고 우투리 엄마 목에다 칼을 겨누고 막 윽박지른 거야. 그러니 어떡하나? 겁이 난 엄마가 그만 뒷산 바위에 묻었다고 말했거든. 그러자 임금이 번개같이 우투리 무덤 있는데로 쫓아갔지. 가서는 벼라별걸로 바위를 열어봐도 안 열리는 거야. 그러다 억새풀로 탁 치자 바위가 쩍, 하고 갈라졌어.”

“탯줄 끊은 그 억새풀이다!”

누가 또 아는 척 한다.

“그래 맞다. 그렇게 해서 열린 바위속을 보니 우투리와 콩 서 되, 좁쌀 서 되, 팥 서 되가 탁 나왔지.”

“그래. 나쁜 임금이 우투리 죽였어요?”

“아니. 못 죽였지. 왜냐? 죽은 지 3년이 됐으면 이들이 다 장수와 병사로 살아날 텐데, 아쉽게도 그만. 그만 3년에 딱 하루가 모자랐던 거야. 그래 그만 폭싹, 가루가 되고 말았어.”

“새드엔딩이다.”

한 아이가 대뜸 나섰다.

 

 

 

“그래. 새드엔딩이야. 우투리는 그만 임금과 싸워보지도 못하고 죽었던 거야. 우투리가 누구나?”

“장차 나쁜 임금을 몰아낼 영웅이지요.”

“그래 맞다. 영웅. 그 영웅이 죽었으니 슬프겠나 안 슬프겠나?”

그러면 애들이 모두 “슬퍼요!”한다.

“바로 그 순간이었어. 우투리가 폭삭 가루가 되어버리던 그 순간! 지리산 어느 냇가에 날개 달린 말이 나타나 사흘 낮 사흘 밤을 울다가 어디론지 사라졌대.”

나는 이야기를 끝내고 아이들 표정을 본다.

아이들도 나를 올려다 본다.

 

“어때? 재미있어?”

옛날이야기를 마치면 마지막으로 물어볼 말이 그 말이다.

열이면 열 모두 재미있다고 대답한다. 그걸로 아이들은 순순히 물러나는가? 아니다.

“하나만 더 해 주세요.” 한다.

“선생님, 빨리 하나 더요.”

또 한 아이가 성화를 댄다.

“내일 해 줄게.”

“아이이.”

“그럼, 다음 시간에 해 줄게.

“아이이, 싫어요. 지금요.”

한번 떼를 쓰면 그걸 또 못 이긴다.

“좋아.”

그러면 아이들은 “야아.” 하고 의자를 또 당겨 앉는다.

 

 

“옛날 옛날에. 그러니까 호랑이가 담배 먹던 시절이었어.”

나는 들려줄 이야기의 줄거리를 머릿속에 간추리며 말의 뜸을 들인다.

 

호랑이가 담배 먹던 시절이라. 이게 대체 어떤 시절일까. 말을 하면서도 참 재미나다. 뭔 별 뜻이야 있을까만 이야기가 현실에서 옛날로 들어가는 통로 같다. 다시 말하면 진실 세계에서 가공한 허구의 세계로 들어가는 길. 허구라고 옛날이야기가 허구이기만 한가? 아니다. 허구이긴 허구이지만 그 속에는 현실이 그림자처럼 꼭 달라붙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의 입에 오르내릴 수 없다. 앞에서 한 “우투리 장수” 이야기도 그 배경엔 폭압을 일삼는 위정자들 밑에서 새로운 영웅이 나타나 주길 바라는 민중의 염원이란게 깔려있다. 그게 없으면 한갓 웃기는 이야기로 전락되고 마는 게 옛날이야기이다. 그런 게 깔려있어야 이야기맛이 더 짭짤해지고 깊어진다.

 

 

 

“옛날 옛날에.”

나는 아이들에게 두 번 째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떤 한 나무꾼이 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사슴 한 마리를 만났어. 그래 자기도 모르게 사슴을 쫓아 산중으로 산중으로 자꾸만 들어간 거야. 얼마쯤 가는데 굴이 하나 나와. 그런데 사슴이 바로 그 굴 속으로 들어가는 거야. 나무꾼도 따라 들어갔지. 가 보니 조그마한 마을인데 별천지 같이 평화스러워. 나무꾼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 여기가 어디냐고 사람들에게 물었지. 거기가 오복동이라는 거야. 옛날, 세상의 난리를 피해 여기 들어와 살게 되었으며, 세상과 왕래를 않고 대대로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거야. 그 후, 나무꾼은 오복동에서 돌아나왔는데 이 말을 들은 세상 사람들이 오복동을 찾아보려 해도 다시는 찾지 못하였다는 거야.”

 

 

나는 이야기를 그치고 또 물었다.

“어때? 좀 이상하지?”

“예. 쫌 멍해지는 것 같아요. 근데 그 오복동 어떤 마을이에요?”

“어. 오복동은 전쟁도 없고, 임금의 간섭도 없고, 먹고 입고 자는 걱정 없는 세상, 당시 힘없는 사람들이 꿈꾸던 세상이야.”

그러니까 이 오복동은 "우투리 장수" 시대 사람들이 더는 임금한테 얻어볼 게 없어 자신들의 마음 안으로 숨어들어간 일종의 피신처다. 우리나라엔 이 상주 오복동 이야기 말고도 그런 곳이 많다. 지리산의 청학동이나 정감록에 쓰여진 산하가 다 그런 곳이다. 그런 곳이 많다는 건 나라 정치가 백성한테 가 있지 못하다는 증거이다.

 

조선의 정치는 백성들에게 지나치게 성리를 강요하는 정치였다. 정치에 입문한 벼슬아치든 입문을 못한 지방 선비든 다들 백성을 잘 먹여살릴 생각보다 성리의 덕목을 가르치려고만 했다. 백성을 무지한 존재로 낮추어 본 것이다. 그러니 무지한 백성들의 재물을 업수이 보았고 그걸 제 것처럼 빼앗는 관리가 많았다. 그 바람에 백성들 밥상은 언제나 빈곤했다. 

 

 

“선생님, 왜 그 오복동 못 찾아냈지요?”

또 한 아이가 묻는다.

“오복동은 그때 사람들이 마음으로 꿈꾸던 동네였으니까.”

머리 굵은 누군가가 내가 할 대답을 대신 해 준다.

 

아직도 시계를 보니 몇 분 더 남았다.

 “선생님,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요.”

누가 또 시작이다. 기왕 공부하기 다 글렀는데 옛날이야기 하나 더 하고 마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렇다 할 이야기가 없다. 아, 이럴 때 할 이야기가 딱 하나 있긴 있다.

 

 

 

“옛날 옛날 옛적에

간 날 간 날 간 적에

나무접시 소년 적

툭수바리 영감 적

너불메기 사또 적

귀뚜라미 사령 적

우렁각시 아이 적

흥부 놀부 어른 적

심봉사 눈 뜰 적

호랑이 담배 피울 적에

한 사람이 살았는데

성은 고가요. 이름은 만이라.

 

  

이쯤 내가 외고 나면 아이들이 합창을 하듯 소리친다.

“고만!”

그럴 적에 딩동댕, 하고 끝종이 난다.

오늘 수업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