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자로 전락한 조선 흥부들
권영상
흥부네 지붕에 박 네 통 열렸다.
그걸 날 좋은 가을날에 따내려 흥부 부처가 톱을 맞잡고 켠다. 밀거니 당기거니 슬근슬근 실근실근 툭 타고 보니 이게 뭔가? 황금 백금 천은 밀화 진주 가득 든 순금궤가 뚝딱 나온다.
아, 그뿐이 아니다. 박 하나 또 밀거니 당기거니 슬근슬근 켜고 보니 연꽃 같이 아름다운 미인이 쑥 나온다. 대저 이 여인이 흥부 앞에 납죽 엎디더니 참 이쁘게도 절을 올리는 게 아닌가. 월궁의 선녀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 미인 가로 왈, “강남국 제비왕이 날더러 그대의 작은부인이 되라 하시기로 왔나이다. 가납하소서”한다.
흥부 속으로 죽겄구나, 죽겄구나, 좋아죽겄구나, 한다. 좋고 좋아서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먹을 것 없어 피골이 상접토록 많은 날을 쪼르륵 쪼르륵 살았는데, 오늘에 이르러 이게 웬 횡재인가. 자개함에 반닫이, 숱한 피륙에다가 억만냥 요술병, 거기다 참 민망하기 짝이 없는 어여쁜 미녀까지 받아들었다. 복에 겹다. 선물도 선물도 제비국 제비왕께서 참 아찔할 만큼 짜릿한 선물을 보내셨다.
어쨌건 흥부 여태껏 살아오며 이만한 호사를 누려본 적이 있을 수 없다. 이 정도 푸짐한 선물이면 제 아내를 불러 백화점 명품관에 보낼 일이다. 명품 옷에, 명품 가구에, 명품 테레비에, 명품 백에, 명품 구두에, 명품 골프채에, 명품 외제 승용차에, 명품 양말에, 명품 이쑤시개에, 명품 발톱깎기에....... 아, 숨이 막혀 다 이르지 못하겠다. 그걸 열흘밤 열흘낮이 넘도록 사들인단들 금궤에 그득한 금에 자리 하나 날까.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꿈이다.
이런 꿈을 꾸고 부스스 깨어날 때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것이 꿈속의 것이 아니라 차가운 현실일 때 받는 충격은 크다. 내 손에 들고 있던 황금 백금 사라지고, 내 품에 안고 있던 월궁 미인 놓칠 때에 밀려오는 허전함은 형언할 수 없이 사람을 고적하게 한다. 그걸 생각하면 이 어리석은 흥부가 또한 가엾기 짝이 없다. 가진 게 아무 것도 없는, 돈 없고 배 고픈 흥부는 그저 하염없이 눈물이나 쥐어짤 일이다. 다시 주린 배를 안고 나보다 더 배고파 우는 자식들을 위해 동냥질을 나서야 한다. 가엾은 인생, 그러나 가혹하게도 인생 역전의 기회는 없다.
흥부가 장가를 들어 아이들 머릿수가 늘어갈 무렵이다. 욕심 많은 그의 형 놀부는 그들 먹일 쌀이 아깝고 불 넣을 땔감이 아까워 내쫓는다. 내쫓아도 참 야박스럽게 내쫓는다. 땅 한 뙈기 쌀 한 톨 주지 않고 새벽 이슬 마르기 전에 내쫓는다.
집 밖이 고생길이다. 당장 어디 가 잠 한숨 눌러잘 곳이라곤 없다.
그때에 흥부 집 짓자는 생각을 한다. 지게를 지고 남의 빈밭에 가 수숫대 한 단을 져다 집 지어놓은 꼴을 보자.
누워 발 뻗으면 발목이 벽 밖으로 불쑥 빠져 나가고, 일어서면 대갈통이 수숫대 지붕을 뚫고 솟구친다. 누우면 지붕 마루에 별이 보이고, 비 오면 굵은 빗방울이 방안에 뚝뚝 진다.
이런 와중에도 흥부는 자식복이 많아 층층이 아들이다. 어린 자식 젖달라, 다 큰 자식 밥 달라 하니 차마 서러워 살 수 없다.
흥부의 이 가난한 살림살이의 서러움과 아픔은 누구 때문인가. 놀부 탓인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걸 꼭 놀부 한 사람에게 뒤집어 씌우기에는 석연찮은 구석이 많다. 만약에 놀부 마음이 제 동생 흥부처럼 관대해 밭도 논도 한 자리씩 주고, 쌀도 콩도 서너 가마씩 들려서 내보냈다 치자. 그랬다면 이 '흥부전'이 아예 태어나지 않았을까. 아니올시다다. 이 흥부전이 그래도 명색이 판소리 12마당 중에서도 다섯 마당에 뽑힌 판소리다. 그 이유는 민초들의 호응이 대단히 높았다는 뜻 아닌가. 수많은 민초들이 이 이야기에 땅을 치고 울고 웃고 콧물을 흘렸다는 건 당대 민초들의 삶 또한 비참했다는 뜻이다. 그들 민초들이 누구인가? 바로 여기 나오는 이 지체아들인 흥부들이다.
가진 게 없는 흥부들이 그 시절, 할 수 있었던 일이란 어떤 것인가?
먼저 흥부 아내를 보자. 주로 품팔이다. 방아찧기, 술집에 술 거르기, 초상난 집 제복 짓기, 그릇닦기, 물 잘 빠짐이 안 되는 더러운 도랑에 오줌치기 등등이다. 이 모두 여자들이 기피하고 싫어하는 일이다.
예나 지금이나 남자는 더 비참하다. 흥부같은 가난뱅이 사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거의 없다. 남의 집에 가 밥 구걸을 하든가 아니면 부자들 비리를 저질러놓은 뒷청소나 하러다니며 매품을 팔았다. 이게 물려받은 땅 한 조각 없는 지체 아들들의 모습이다.
현실이 이런데도 나쁜 국어 교과서들의 흥부에 대한 평을 좀 보자. 흥부는 게으르고,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헤쳐나갈 위인이 못된다고 험담한다. 그러나 어쩌겠나. 이게 현실인 걸. 글버딛고 일어설 아무 일자리 하나 없는 이것이 흥부들 앞에 닥친 현실인 걸.
임병 양란 뒤의 국고 사정은 어떤가? 빌대로 텅텅 비었다. 나라 임금도 백성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그러니 저임금 일자리 하나 있을 리 만무하다. 설령 있다한들 식구가 한 입이 아니다. 그러니 맨날 이 거리 저 거리, 아니면 이 집 저 집 찾아다니며 집 한 단 얻어 짚신이나 간신히 매어 제 발 하나 감싸는 일이 고작이다. 피 나는 노력을 하라 하지만 할 곳이 없다.
이때가 어느 때인가.
조선의 실학이 등장하면서 경제라는 것에 너도나도 눈을 떠 가던 때다. 너도 나도 매점 매석을 하든 매관 매직을 하든 일단 돈부터 벌고 보자는 풍조가 일어날 때다. 그러니까 서울에 신흥부자들이 슬슬 나타나던 그 무렵이다. 양반, 양반 위세 떨었지만 그런 양반 말이 양반이다. ‘한 푼어치’도 안 되는 별 쓰잘데 없는 양반들이 돈의 위세 앞에 좌절하던 때다.
이 때에 이 대열에 뛰어든 인물이 누구냐? 흥부의 형님 놀부시다. 이 자는 돈만 된다면 뭐든 다 한다. 제 동생 흥부가 제비 다리 고쳐주어 부자가 됐다는 걸 알고는 삼동부터 제비를 기다린다. 그 제비 돌아오자 독사 한 놈을 잡아다 제비 새끼 잡아먹게 한다. 그것도 부족하여 제비 새끼 다리를 딱 분질러버린다. 못 할 게 없다. 돈도 단번에 버는 돈일수록 돈맛이 좋다는 걸 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졸부다.
놀부가 하루는 연못가에서 나무를 찍다가 그만 도끼가 풍덩 연못에 빠진다. 산신령이 놀부의 딱한 울음소리를 듣고 금도끼를 가지고 나온다. 그걸 본 놀부 입에 군침이 돈하다. 이게 네 거냐고 묻자, 놀부 대뜸 그렇다고 한다. 우선 금도끼부터 챙겨놓고 볼 일이다. 왜냐? 이런 기회라고 자주 있는 게 아니다. 다음 번에 은도끼를 들고 나온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또 나온다는 보장이 없다. 현실에서 빠삭한 놀부가 그쯤 모르겠는가.
돈, 돈, 돈!
돈만 있으면 다 되는 세상. 돈만 있으면 맞을 죄 저질러 놓고 사람을 사서 대신 맞게도 한다. 돈만 있으면 백정도 양반을 싼값에 사서 양반 행세를 할 수 있다. 양반뿐인가? 힘있고 세도 있는 고위 고관직도 살 수 있다. 그런 돈 판이니 놀부 이 사람 부모 제사 지낼 제수 사서 젯상에 올리는 일마저 아까워한다. 놀부하는 양 보아. 어물 대신 제삿상에 어물 살 돈을 얹고, 삼실과 대신 삼실과 살 돈을 얹고, 고기 대신 고기 살 돈을 얹는다. 그렇게 제사 다 지내고 나선 어쩌는가? 그 돈모두 거두어 제 주머니에 도로 슬쩍 넣는다. 부모에게도 이러는 판에 형제들에게 밭을 떼어주고 쌀을 준다? 놀부를 뭘로 아는가. 그렇게 신흥 놀부들이 생겨나던 세상의 이쪽에 아직 돈맛이 뭔지 세상 물정에 어두운 이들이 있다.
그들이 바로 흥부들이다. 그들은 가진 거라곤 없다. 있다면 목구멍 풀칠에 아무 소용없는 것들을 전가의 보도인양 지니고 산다. 그게 뭐냐? 이미 낡을 대로 낡아버린 헌신짝 같은 '윤리'이다. 그 이름도 찬란한 ‘형제간의 우애’라는 유교의 도덕이다. 가난한 동생들이 의지할 것은 오직 이것 밖에 없다. 왜냐? 장자 상속 법도의 피해자들이 매달릴 데가 현실적으로 이것 이외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회보장제도라고 없던 그 시절, 그들이 부빌 언덕은 오직 '형제간의 우애'라는 낡은 윤리뿐이다. 하지만 사회적 약자인 흥부들은 부모 유산을 독점한 놀부들로부터도 이마저 철저히 외면 당한다.
흥부들은 매양 착하다. 장자들보다 상대적으로 학문을 접촉할 기회가 없었다. 학문할 기회가 적은 흥부들은 그러므로 상대적으로 순수하다. 노골적으로 말해 이들은 눈치빠른 공부를 못해 한물 간 가치에 매달려 살았다.
흥부는 매품을 팔러 하루 백팔십 리 길을 걸어간다. 매 맞고 30냥을 얻어볼 요량으로 갔지만 허탕을 친다. 그런 흥부가 가여워 김부자의 조카는 흥부에게 돈 여덟 냥을 거저 주며 밥이나 사 먹으라 한다. 그 돈을 들고 돌아오며 흥부 하는 말씀.
“남의 돈을 공으로 먹으면 염치가 없다.”
이런다. 남들은 눈 딱 감고 매점 매석, 매관 매직해 턱턱 큰 돈을 버는데, 돈 여덟 냥을 받아쥐고 이렇게 발발 떤다.
후대의 학자들이 현실적인 인물이라고 평가하는 흥부의 아내는 어떠한가. ‘남의 죄를 어찌 알고 대신 맞는단 말이냐?’며 부조리하게 돈 버는 일을 꺼린다. 딱하다. 그녀는 ‘흙을 금으로 알고, 돌을 옥으로 알고, 해害라도 복으로 알자’는 인물이다.
이들은 경제적으로 빈한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의식 또한 강자들이 팽개친 '착한 양심'에 매달려 살았다. 이러니 이들이 이 험난한 세상에서 돈 벌어 밥술을 뜨겠다는 것은 마치 나무에서 고기를 잡는 일만큼 지난한 일이다.
현실적으로 이들에게 인생 역전이란 없다. 부잣집 자제로 태어나지 못했기에 과거에 응시할 능력도 재력도 없다. 과거에 응시하려면 노량진 고시원을 밥 먹듯 들락이든가, 원룸 생활 2,3년은 각오해야 한다. 그도 아니면 도적패가 되든가, 장사 수완을 배우든가. 그러나 그들에겐 막힌 현실을 뚫어나갈 돈도 없고, 사회적 장치도 없다.
우리의 교과서는 지금도 이 흥부전을 형제간의 우애를 주제로 하는 풍자소설이라는 정답을 제시한다. 나도 한 때 교편을 잡은 일 중에 이런 일에서 부끄러움을 느꼈다. 이 소설은 선행을 하면 부를 얻는다는 권선징악의 글이기 보다 인생에 좌절한 빈자들의 슬픔을 고발하는 작품이다.
그렇다고 이 흥부들을 마냥 슬픈 현실에 매달려 징징거리며 울게 할 수만은 없다. 이 엄혹한 현실을 뛰어넘을 구멍을 열어 주어야 한다. 그게 뭔가? 개똥밭 같은 이 이승마저도 사랑하며 살게 하려면 보상이 필요하다. 40만원씩 나누어 주어선 성이 안 찬다. 뭔가 안 될 일이더라도 듬뿍 주어 마음을 달래어야 한다.
그 보상을 보자.
제비 다리를 고쳐주었더니 이듬해 제비새끼들이 보은표 박씨를 물고 왔더라. 그걸 심자, 박 네 덩이가 커올랐다. 그 놈들을 따놓고 흥부 잠시 생각한다. 그 중 하나엔 금은보화가 들어있고, 또 그중 하나엔 억만 냥이 들어있고, 또 그 중 하나엔 온갖 세간이 들어있고, 또 그중 하나엔 언제나 남루한 옷차림의 못 생긴 마누라 말고 예쁜 선녀나 하나 나왔으면....... 이 정말 얼마나 황홀한 상상인가.
흥부가 박 하나를 뚝 따와 저의 아내를 불러앉힌다.
그러고 톱질 한다. 톱질을 해도 이렇게 한다. 밀거니 당기거니 밀거니 당기거니 슬근슬근 , 실근실근 ........ 주저앉은 방뎅이가 들썩들썩, 머리 위에 꽂은 상투 덜렁덜렁, 콧방울이 불룩불룩. 아주 톱질을 해도 지벌나게 한다. 어깨춤을 추듯이, 내리막길을 달려가듯이 신이 난다. 그렇게 하여 쩍 갈라진 박속에서 황금 백금 천은 밀화가 확 쏟아질 때 눈을 감고 앉은 흥부의 입가에 행복한 웃음이 돈다.
행복의 순간은 한번만으로 부족하다. 세 번! 세 번이다. 세 번씩이나 쏟아지는 행운에 흐뭇한 웃음을 웃어본다. 그러고 그냥 눈을 뜨려니 아쉽다. 그래서 삼 세 번에서 하나 더 네 번째 박을 켠다. 밀거니 당기거니, 그러고 또 쩍, 박이 갈라진다. 아, 이게 웬 벼락인가. 삼삼하게 생긴 선녀 한 분이 나와 흥부의 손을 잡는다. 작은부인이 되겠단다. 맞은 편에 앉아 방뎅일 들썩대며 톱질하던 아내 보기가 미안하다. 그러나 이미 황금 백금 배부른 아내가 그깟 여자 하나 눈 못 감아줄까.
이제 흥부는 이 세상에서 부러울 것 하나 없다. 곡간이 꽉꽉 차도록 쌀이 그득하고, 금궤가 가득하도록 금은보화가 가득하다. 고대광실 너른 집에서 한 평생을 살 일만 남았다.
이 보상은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욕심투성이 놀부놈을 아주 멱살을 잡아 공깃돌 가지고 놀듯 을러대고, 이 뺨 치고 저 뺨 치고 생주리를 틀어' 분풀이를 하는 일이다. 그뿐인가. 온갖 재산 다 빼앗고, 박에서 솟구쳐 오르는 똥줄기에 똥벼락까지 맞게 한다. 망신을 주어도 아주 흠뻑 준다. 그걸 보며 배꼽이 빠져라 웃게 하여 속에 든 서러움을 확 씻어주는 일.
그것으로 설움 받은 흥부와 그 시절 흥부들의 마음을 치유해 주는 일. 속이 후련하도록 크게 한판을 벌여 맺히고 맺힌 분을 신나도록 풀게 해준다. 이렇게 하여 흥부는 차츰 조금씩 살만한 마음을 갖게 된다. 그런 까닭에 사정없이 힘든 세월을 또 만나도 ‘에라! 이 풍진 세상아’하며 참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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