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비평

한국 예술가를 사랑한 두 일본 여인

권영상 2013. 4. 24. 16:13

한국 예술가를 사랑한 두 일본 여인

 

-구보다 시게코와 야마모토 마사코-

 

 

 

 

 

 

살구꽃이 피려할 때 잠들었는데 자고 일어나 보니 그 꽃 다 졌습니다. 마당이 온통 떨어진 살구꽃잎으로 가득합니다. 별이 무리져 떠 있는 하늘을 걷는 기분입니다. 오랫동안 잠을 잤습니다. 꼭 21일을 잤습니다. 그 동안 백남준 곁에 누워 함께 잠을 자다가 깨다가 하며 비몽사몽했습니다.

백남준 전기를 좀 써달라고 출판사에서 요청이 왔습니다. 처음엔 호기심으로 승낙을 했는데, 읽으면서 보니 좀 두려워졌습니다. 그래도 약속을 지키기 위해 꾸준히 글을 써내려갔습니다.

 

 

백남준이 피아노 연주를 시작합니다.

손이 아니라 이마로, 팔꿈치로, 어깨로 미친 듯이 피아노를 두드립니다. 청중들은 이 놀라운 연주에 한숨을 쉬거나 비명을 지르거나 딱, 입을 벌립니다.

“피아노가 죽어야 음악이 살어!”

백남준은 벌떡 일어나 피아노의 건반을 쥐어뜯습니다. 피아노 줄을 길길이 뽑습니다. 그러더니 피아노를 무대 끝으로 밀고가 냅다 밀어버립니다. 피아노가 비명을 지르며 무대밖에 나가 떨어집니다.

“콰다다다당.”

피아노 박살나는 소리가 연주회장을 울립니다.

 

 

1959년 백남준은 다름슈타트에서 만난 존 케이지에 흥분합니다. 케이지를 만난 건 일본 유학 시절이었지요. 솔직히 말해 백남준 예술의 시작은 존 케이지가 아닐까 합니다. 그는 그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매체를 이용하여 누구도 성공적으로 다루지 못한 비디오나 폐쇄회로 텔레비전까지 예술 속으로 이끌어 들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전기를 다 쓰고 나서도 내 마음에 애잔하게 남는 것이 있습니다.백남준의 아내 구보타 시게코입니다. 그는 일본에서 태어나 한국의 예술가를 사랑한 여인입니다. 그를 생각하려니 또 한 여인이 있습니다. 이중섭을 사랑한 일본 여인 야마모토 마사코입니다.

왜 그들은 외롭고 쓸쓸하도록 한국의 청년 예술가들을 사랑했을까요?

 

 

 

1964년 6월, 요미우리신문에 백남준에 관한 기사가 났습니다. 미술학교 학생이던 시게코는 이 기사를 보고 흥분을 하지요.

“백남준을 내 남자로 잡고 말겠어!”

그때 그 기사의 내용이 ‘파괴의 미학’이었습니다.

‘64년이면 백남준이 미국에 이주해 있을 때입니다. 백남준은 일본 유학을 거쳐 독일로 갔지요. 50년대만 해도 일본은 전위 예술이 판을 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일본에서 존 케이지를 알았고, 대학을 마치고 독일로 가 거기서 다시 케이지를 만났지요.

 

1957,8년 독일 다름슈타트에서 “신음악을 위한 국제 여름코스”가 열렸습니다. 엄청나게 뜨거웠던 국제적 행사였던 모양입니다. 요즘 사회비평을 공부하면서 알게 된 이름들이 거기 있었습니다. 루이지 노노, 아도르노, 스톡하우젠, 존 케이지도 물론 거기에 왔었고, 백남준은 거기에서 윤이상도 만나게 됩니다.

주로 아방가르드 예술이 유럽을 휩쓸던 무렵입니다.

 

 

백남준은 텔레비전 매체에 관심을 가지면서 미국으로 이주합니다.

그때가 1964년입니다.

그 무렵, 백남준은 도쿄에 와 퍼포먼스를 했던 모양입니다. 구보타 시게코는 거기에서 백남준과 조우합니다. ‘백남준을 내 남자로 만들겠다’던 시게코에겐 절호의 기회였겠지요. 퍼포먼스가 끝나자, 시게코는 공연장 뒤로 가 백남준을 만납니다.

“차 한잔 하시겠어요?”

어디에서나 남녀는 이런 대화를 시작으로 만나게 되는 모양입니다.

낯선 여류 예술가의 이 당돌한 제의를 거부할 수야 없었겠지요. 백남준도 뜨겁고 격정적인 남자였으니까요. 차도 마시고, 밥도 먹었겠지요.

그런 만남이 있고 백남준은 미국으로 훌쩍 가버립니다.

 

 

혼자가 된 시게코는 견딜 수 없었지요.

그해 7월 백남준이 있는 뉴욕으로 떠납니다. 뉴욕에서 일어나고 있는 플럭서스 운동이 또 몹시 부러웠겠지요. 거기엔 존 레논의 여자 오노 요코도 있었고, 현대무용가인 시게코의 이모도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뉴욕으로 간 시게코는 꽤 오랫동안 백남준과 함께 했던 모양입니다. 나중 시게코의 말을 빌리면 자신은 백남준의 ‘실질적인 아내’였다고 했습니다.

1969년은 시게코에게 잔인한 해였습니다. 백남준이 여성 첼리스트 샬롯 무어맨과 공연을 다니던 해입니다. 그 공연 소식, 들어 좀 아시지요? 투명한 옷을 입긴 했지만 맨몸 같은 무어맨을 껴안고 활을 그어대며 첼로 연주를 하는 백남준의 포퍼먼스.

 

 

 

 

시게코는 그때, 백남준과 무어맨의 관계 때문에 충분히 외롭고 쓸쓸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순회 공연에서 돌아온 어느 날, 시게코는 유대인 음악가 데이비드와 결혼을 해버립니다.

“잘 했어. 나는 결혼이 맞지 않아.”

백남준은 아무렇지 않게 그 일을 받아들였습니다.

그 후 3년이 지난 어느 날, 백남준을 떠난 시게코한테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나, 지금 당신한테로 가겠어.”

그렇게 해서 시게코는 데이비드를 버리고 다시 백남준 곁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무렵의 시게코의 마음이 어떠했겠어요. ‘내 남자’ 곁에 있어도 내 남자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고,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겠다고 말할 때에도 ‘그래, 그와 결혼해’ 하는 사내. 그를 못 잊어 다시 돌아오겠다고 했을 때도 아무 일 없다는 듯 ‘그래, 와.’ 하는 남자. 모르긴 해도 그때의 시게코의 속은 까맣게 타고 타고 또 타서 재가 되었겠지요.

 

 

그런데 말이지요.

왜 백남준은 구보타 시게코든, 아니든 이미 마흔이 넘은 나이에 결혼을 하지 않았을까요? 예술가들은 여자로부터 영감을 받는 경우가 너무도 많거든요. 물론 백남준은 결혼이라는 형식에 매이길 싫어했을 게 분명하긴 합니다. 그렇기는 해도 결국 결혼을 한 걸 보면 조금의 의구심이 지워지지 않습니다. 왜 그때까지 결혼을 하지 않았을까요? 혹시 오래 전에 마음에 두었던 여자가 있었던 건 아닐까요? 그녀의 얼굴을 닮은 아기를 낳아 행복하게 살고 싶었지만 이미 그녀는 남의 여자가 되어버렸던 건 아닐까요? 심중에 집히는 여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구보타 시게코는 덜컥 암에 걸립니다.

아프고 아팠던 그녀의 허전한 생애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결국 병원비가 두려운 시게코는 눈물로 일본행 짐을 쌌습니다.

다 싸놓은 짐을 본 백남준이 시게코의 손을 꽉 잡습니다.

“우리 결혼하자, 당장!”

다음 날로 마치 퍼포먼스처럼 두 사람은 결혼을 했습니다.

그렇게 마음이 여린 게 백남준입니다.

백남준에겐 주머니 속에 숨긴 의료보험카드가 있었습니다. 그는 진정으로 시게코를 사랑해서 결혼한 걸까요? 아니면 그를 살리기 위해 했던 걸까요?

 

 

 

 

1996년 백남준이 뇌졸중에 걸렸습니다.

몸을 돌보아 주던 구보타 시게코에 의지해 10년을 더 살다가 74살에 백남준은 죽고 맙니다.

그 후 경기도문화재단에서 백남준 기념관 개관식을 할 때였지요. 그 때 백남준의 부인 구보타 시게코 여사가 방한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중앙일보와 인터뷰한 그녀의 기사를 보고 나는 놀랐습니다. 그의 백남준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아프고 쓰라렸는지를.

그녀는 백남준을 사랑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365일 24시간 온전히 내 남자로 돌볼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그 10년이.”

 

이 글을 읽는 순간, 나도 모르게 내 눈에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사랑이란 대체 무엇인지.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와서야 비로소 힘없고 병든 ‘내 남자’를 ‘차지한’ 구보타 여사의 절절히 아픈 마음을 위로해주고 싶었습니다. 이국의 한 남자를 사랑했지만 자신이 온전히 차지할 수 있었던 건 백남준의 병든 몸이었습니다.

그마저도 간절히 사랑할 수 있는 게 바로 일본 여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내 아니 스물 둘,

처음 수돗가에서 당신을 보았을 때부터 당신이 마냥 좋았습니다.

일본 분카가쿠잉의 재학생이던 우리 둘,

나란히 서서 붓을 씻었지요.”

 

 

 

이중섭이 그의 아내 마사코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이중섭은 그렇게 그의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와 만났습니다. 일본 미술학교 재학 시절 배구를 하던 이중섭의 늘씬하고 잘 생긴 모습에 마사코는 반했던 겁니다.

실기 수업이 끝나고 수돗가에 나가 팔레트와 붓을 씻다가 둘은 만났습니다.

 

 

해방이 되고, 귀국하여 원산에서 결혼을 했지만 두 사람의 행복을 가로막는 것이 있었지요. 아내가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친일파로 분류되어 곤욕을 치루었던 일과 연이은 터진 6.25 전쟁이었습니다. 고향에 그냥 눌러 있을 방도가 없었습니다.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부산 범일동으로 피난을 와 부두 하역 일을 했습니다. 대지주의 아들인 그가 아는 거라곤 그림을 그리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거라곤 없었던 거지요.

 

 

끼니 해결조차 어렵게 되자, 다시 서귀포로 이사를 합니다. 그때가 그의 나이 36살.

그 동네 이장님 집 끄트머리 단칸방을 얻어 네 식구가 살았던 모양입니다. 고구마로 연명을 했다고 합니다. 반찬이 없어 아이들을 데리고 바닷가에 나가 게를 잡았고, 아니면 굶는 채로 견뎠던 모양입니다. 그림을 그리고 싶어도 돈이 없어 담배 은박지에 송곳으로 금을 그어 그림을 그렸는데, ‘게와 가족’, ‘꽃과 아이들’ ‘섶섬이 보이는 풍경’ 등이 그것이지요.

참 어지간히도 궁핍했던 모양입니다.

처가에서 보내 주는 돈으로 근근히 살다가 끝내 아내는 아이들 둘을 데리고 일본으로 가버립니다.

 

아내를 못 거두고, 자식을 먹이지 못하는 아버지.

그 때문에 병든 아내와 자식들.

그래서 멀고먼 일본으로 보내야하는 이중섭.

 

 

 

 

그때, 봇짐을 싸들고 일본행 배에 오르던 마사코의 모습이 또 눈에 선하게 떠오릅니다. 그때의 그 쓸쓸한 모습을 생각하려니 가슴이 먹먹합니다. 마치 “삼국유사”에 나오는 ‘조신의 꿈’이 그렇습니다.

그녀를 너무도 사랑해 그녀와 결혼했는데 자식 낳고 살아보니 산다는 게 너무 비참해졌습니다.

“당신은 남쪽으로 가세요. 나는 내 고향으로 가겠오.”

한 생을 살았던 조신의 아내는 그러며 조신과 헤어집니다.

 

‘수돗가에 나란히 서서 붓을 씻던’ 그 22살의 사내와 여자가 아이 둘을 낳고 사는 일이 힘에 부쳐 이렇게 작별합니다.

헤어져 사는 동안 두 사람은 수없이 많은 편지를 보내며 곁에 없는 가족을 그리워합니다.

 

 

“꼭 아스파라가스군이 아고리를 잊지 않았는지 물어보고 답장 주기 바라오. 남덕의 얼굴만인 큰 사진을 하나 보내 주시오. 나의 상냥한 사람이여. 참으로 나만의 아스파라가스군의 사진을 이 아고리는 보고 싶소. 빨리 부탁하오.”

 

이중섭의 아내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눈물겹게 배어 있습니다. 이 편지에 나오는 '아스파라가스군'은 이중섭의 아내이며 '남덕'도 이중섭이 지어준 한국 이름입니다. '아고리'는 우리 말로 발가락, 이중섭의 발가락이 통통하고 예뻐 그의 아내가 불러준 이중섭의 애칭입니다.

 

아내와 아이들을 보내고도 사는 살림은 너무도 궁핍했습니다.

그래서 떠올린 게 일본에서 출판되는 책을 처가에서 외상으로 사서 이쪽으로 보내면 이중섭이 이문을 남기고 팔아 다시 처가로 보내기로 했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처가로 보낸 돈을 그의 친구가 모두 가로챘던 모양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이중섭은 시인 구상의 도움으로 일본에 건너갑니다.

가서는 빚덩이에 올라앉은 장모한테 냉대를 받고 쫓기듯 고국으로 되돌아왔습니다.

배고픔에 지쳐 길거리에 쓰러진 이중섭을 친구들이 병원에 입원시켰습니다. 그러나 의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에게 밥을 먹이는 것밖에 없었답니다. 너무나 굶주렸기 때문이었지요.

이중섭은 그렇게 40년을 가난 속에서 살다 1956년 9월 6일 홀로 숨을 거둡니다.

 

 

 

 

그 후, 2012년 이중섭 기념관이 ‘이중섭 신년 기획전’을 할 때입니다. 일본에 사는 이중섭의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 여사가 방한을 하였습니다.

그의 손엔 오래된 파레트 하나가 들려 있었습니다.

“그 옛날, 중섭이 내게 사랑을 고백하며 준 것입니다.”

해방 전, 이중섭이 일본에서 활동할 때 사랑의 징표로 마사코에게 준 선물이었습니다.

그녀는 그 첫사랑을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고 아픔처럼 품안에 고이 간직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70여년이 지난 지금에야 깊고 깊어진 눈물처럼 내놓았습니다.

 

 

왠지 일본 여인의 아련한 사랑법을 보는 것 같습니다.

마사코의 마음에서, 또 구보다 시게코의 마음에서. 그들과 아무 관련이 없는 한 사내의 마음으로 그들이 겪은 서로움이 아련히 다가옵니다. 이게 일본 여인의 사랑법인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