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비평

가수 김창완씨가 동시를 썼다고?

권영상 2013. 4. 28. 08:26

 

 

 

 

 

 

가수 김창완씨가 동시를 썼다고?

권영상

 

 

 

 

한밤중에 목이 말라 냉장고를 열어보니

한 귀퉁이에 고등어가 소금에 절여져 있네.

어머니 코 고는 소리 조그맣게 들리네.

 

어머니는 고등어를 구워주려 하셨나 보다.

소금에 절여 놓고 편안하게 주무시는구나.

나는 내일 아침에는 고등어 구일 먹을 수 있네.

 

어머니는 고등어를 절여 놓고 주무시는구나.

나는 내일 아침에는 고등어 구일 먹을 수 있네.

나는 참 바보다. 엄마만 봐도 봐도 좋은 걸

 

 

 

 가수 김창완씨의 노래 “어머니와 고등어”다.

1987년에 발표한 김창완씨가 작사하고 작곡한 노래라 한다. 나는 그가 돗수 높은 커다란 안경을 쓰고 기타를 치는 모습이 좋다. 주름살이 여기여기 얹혀있는 꾸밈없는 그 얼굴이 좋다. 어떻게 보면 순진한 아이 같고 또 어떻게 보면 장난꾸러기 같다. ‘장가 갔나?’ 김창완씨를 볼 때마다 나는 그 천진스럽게 웃는 웃음, 장난끼 있는 흐늘흐늘한 몸짓과 가끔 엉뚱한 액션을 보면서 그런다. ‘장가 갔나?’

 

언젠가 어느 드라마에서 “빠바앙!” 하며 제 아내에게 손가락 총을 쏘던 그의 소년같은 연기를 기억한다. 연예인이라면 자신의 포지션을 지키려고 억지스런 모션으로 긴장하며 살 것 같은 데 의외다. 나는 가끔 텔레비전에서 그를 볼 때면 그가 개그맨인지, 탈렌트인지, 가수인지 광고 모델인지 혼동될 때가 있다. 그만큼 그는 ‘전형적인 인간’이 아니다.

 

 

“한밤중에 목이 말라 냉장고를 열어보니.....”

나는 이 노래가 참 좋다.

단조로운 기타 연주라서 좋다. 비명을 지르는 노래가 아니라 음역이 좁은 좀 단조로운 느낌 때문에 더 좋다. 마치 한 편의 동요를 듣는 기분이다. 따스하다. 듣고 나면 가슴이 맑아지는 것 같다. 곡이 좀 단조로우면서도 가슴이 맑아지는 데는 이유가 있다. 가사 안에 담겨있는 어머니의, 가족을 사랑하는 소박한 마음이 우리 마음을 크게 울리기 때문이다. 어른들을 위한 대중가요의 노랫말이지만 들여다 보면 꼭 동시 같다.

 

 

고등어, 고등어는 돈 많고 부유한 사람들이 먹는 생선이 아니다. 그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보통 사람들의 식탁에 즐거이 오르는 생선이다. 졸여도 먹고, 구워도 먹고, 자반을 해서 먹어도 좋은 비린 생선이다. 고등어는 힘겹게 사는 사람들의 애환을 다 안다. 그 고등어를 가족에게 먹이기 위해 소금에 절여 냉장고에 넣어둔 어머니가 반쯤 입을 벌리고 주무시고 있다. 그 어머니가 누구인가? 우리들의 어머니다.

대중가요 가수답게 공감도가 높은, 그러니까 보통사람들의 친근한 입맛 ‘고등어’를 노랫말의 중심소재로 뽑았다. 절묘하게 선택한 소재로 절묘하게 주제를 연결시켜 은근히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 가수 김창완씨가 동시 전문지, 계간 <동시마중> 3,4월호에 5편의 동시를 실었다. 왜 실었을까? 어쩌면 동시에 대한 남모를 사랑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도 아니면 작사 활동을 통해 얻은 동심적 경험을 모든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어떻든지 그의 그런 착한 마음에 나는 감동했다.

대중가수도 동시를 쓰고, 화물비행기 조종사도 동시를 쓰고, 막장에서 탄을 캐는 광부도 쓰고, 국무총리도 좀 쓰고, 대통령도 써서 가끔은 기자회견 전에 동시 한편 읽어주는 세상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세상 사람들이 저절로 착해지지 않을까. 세상에는 아무리 많은 돈을 퍼부어도 해결할 수 없는 아픈 눈물이 있다. 그 눈물을 때로 동시 한 편이 닦아줄 수도 있다.

김창완씨의 동시를 쓰는 용기가 너무 아름답다.

 

 

집으로 배달되어온 <동시마중>을 받아 그의 시가 있는 페이지를 펼칠 때 내 마음은 설레었다.

‘대중가수가 쓴 동시는 어떤 빛깔일까?’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그의 동시를 읽었다.

 

 

할아버지 참 바보 같다.

불알이 다 보이는데

쭈그리고 앉아서 발톱만 깎는다.

시커먼 불알.

 

 

“할아버지 불알”이란 동시가 제일 첫들머리에 있다.

나는 앞의 세 줄의 동시를 읽고, 마지막 네 번째 행에 놓인 ‘시커먼 불알!’ 그러고는 시를 한참이나 들여다 보았다.

그때 시가 내게 말했다.

“너도 이런 모습 알고 있지?”, “이런 모습 본 적 있지?” 또는 “너도 아들 앞에서 이런 적 있었지?” 그렇게 자꾸 내게 물었다. 나는 창피했지만 솔직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랬던 경험이 있다. 팬티만 입고 거실에 앉아 과일을 먹고 있을 때다. 내 팬티 바깥으로 비죽히 고개를 내민 나의 거시기를 가리키며 “얘 본다고! 좀!” 그러며 아내가 내 옆구리를 쥐어박던 일이 떠오른다. 나는 웃는다.

 

 

이 동시는 그러니까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그런 공감을 이끌어내고 있다. 그 공감만 이끌어낸다면 ‘시커먼 불알’이든 김경주 시인의 아버지의 팬티 사이로 빠져나온 ‘누름한 불알 두 쪽’이든 걱정할 일이 아니다. 그건 벌써 특정 성기의 이름을 벗어나 힘들도록 거친 인생을 산 너무도 성스러운 의미로 환치되기 때문이다. ‘시커먼 불알’이 출현한다 해도 동시가 되기에 너무도 충분하다.

 

 

흙도 안 묻은,

길에 떨어져 있는 애기 신발.

아무리 크게 울어도

아무도 안 쳐다본다.

  

 

"잃어버린 신발" 이라는 넉 줄 밖에 안 되는 단행시다.

길에 떨어진 예쁜 '애기 신발'을 본 시 속 화자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모르긴 해도 화자는 애기 신발 앞에 서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신발 주인을 찾았을 것이다. 괜히 목을 빼어 골목 안을 비끔히, 아니면 건물 옥상 위도 한번 쳐다봤을 것이다.

그래도 주인은 없다. 애기 신발을 집어든다. 손에 잡고보니 주인을 찾느라 울어댄 신발의 눈물자국이 보인다. 이 신발을 잃어버린 아기는 어떤 아기일까? 사내 아이일까? 계집 아이일까? 몇 살쯤 될까? 귀여울까? 미울까? 엄마 등에 업혀가는 지금쯤 신발 잃어버린 걸 알까 모를까?

그러다가 화자는 가엾은 애기 신발을 그만 제 자리에 놓고 가버린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이 시에서 대충 이 정도쯤 읽고 떠날 것이다. 그러나 시 읽는 훈련이 조금 된 사람이라면 다르겠다.

이 시의 스토리를 한번 보자.

시가 간단하듯 사건도 간단하다. 길에 떨어진 애기 신발이 주인을 찾아달라고 소리쳐도 다들 못 들은 척 한다, 이 말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간추려 놓고 보니 이 시의 느낌이 확 달라진다. 그저 ‘애기 신발’인 줄 알았던 ‘애기 신발’이 ‘애기 신발’이 아니다. 지금은 끈끈한 사이지만 언제든 ‘헤어지면 남남이 되고 마는 우리, 또는 나’일 수도 있다. 아무리 도와달라고 소리쳐도 외면하는, 비정한 도시 군중 속에 묻혀사는 ‘외로운 나’는 아닐까. 지금은 내게 사랑한다 사랑한다 하지만, 지금은 너 없으면 못 산다 못 산다 하지만, 지금은 내 아들! 내 딸! 하지만 떠날 때는 분연히 떠나고마는 그 배신 뒤에 쓸쓸히 상처투성이로 남게 될 ‘우리’는 아닐까.

 

 

언젠가 애기 엄마는 애기가 신발 잃어버린 걸 알게 되겠다. 그때 엄마는 우는 아기를 뭐라고 달랠까? 혹시 “이보다 더 좋은 신발 사줄게.” 그러며 달래지는 않을까. “반짝반짝 빛나는 비싼 구두 사줄게.” 그러며 아기의 눈물을 닦아주지는 않을까.

어제까지 ‘예쁘다, 예쁘다’ 하며 사랑받던 애기 신발이 오늘엔 이런 식으로 비참하게 버림받는다. 그게 소비사회를 사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모습이다. 어제의 것은 더 나은 오늘의 것에 밀려난다. 오늘 내가 끔찍이 사랑하는 이것도 내일이면 내일의 것에 밀려난다. 그건 사물만이 아니다. 그렇게 사물을 대하는 우리의 습관이 인간에게도 똑 같이 가해진다. 그게 현실이다. ‘애기 신발’의 눈물겨운 비명은 어쩌면 사람들의 관심 바깥으로 밀려나는 고독한 우리들의 몸부림과 같다.

 

 

 

시를 읽는 일은 실은 시를 감상하는 것이 아니다.

시라는 얼굴을 통해 지금 여기에 서 있는 자기 자신을 감상하는 것이다. 자기를 풍부히 감상하려면 ‘나’와 ‘우리’가 지금 처해 있는 현실을 눈여겨 보며 살아야 한다. 왜냐하면 시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모순된 현실을 폭로하거나 빈정대거나 조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 순수시라 하더라도 그 시의 갈피 갈피를 헤쳐내면 눈치채지 못하도록 숨겨놓은 모난 현실이 있기 마련이다.

 

 

역시 대중가수가 쓴 동시답지 않은가.

이웃이 아파하든, 좀 도와달라고 소리치든 통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 요즘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다. 먹고 사는 일이 예전보다 나아졌지만 우리들의 영혼은 가난하다. 이게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이다. 김창완씨는 ‘애기 신발’ 속에 그런 아픔을 숨기고 있다. 쉽게 잘 썼다. ‘쉽게’라는 말은 ‘모두가 공감할 수 있게’라는 말이다.

처음 읽을 때는 그냥 단순한 동시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면 동시를 잘 감상한 사람이다. 시인도 시의 전략을 잘 세웠다고 볼 수 있겠다. 이처럼 단순한 사실에서 큰 의미 쪽으로 자꾸 자꾸 사고를 넓혀가는 힘을 의미의 확산력이라 한다. 의미의 확산력이 뛰어난 사람일수록 인생을 사유하며 풍부히 살았다는 뜻이다.

 

 

꽃에 나비가 날아와 앉았다.

긴 대롱을 꽃받침까지 밀어 넣었다.

재채기가 날 법도 한데

어떻게 참을까?

그래서 꽃잎이 흔들렸나?

재채기 참느라고.

 

 “어떻게 참을까”라는 동시의 뒷부분이다.

이 동시를 읽으면서 그래, 김창완씨가 그렇도록 착하고 순수해 보인 이유가 여기 있었구나 했다. 꽃잎이 흔들리는 이유를 꽃이 하는 ‘재채기’ 때문이라고 보는 그의 동심. 이런 것이 동심이다. 꽃잎이 흔들리는 이유를 물리학적 관점에서 찾는다면 그건 동시가 아니다. 그건 객관적인 사실일 뿐이다. 그런 객관적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는 지식이므로 독자의 감동을 자극할 수 없다. 그것으로부터 벗어났을 때 사람들은 ‘그래. 이건 김창완표야’ 그러며 그의 감성에 감탄을 보낸다.

 

 

나비가 긴 대롱을 꽃받침까지 밀어넣을 때의, 그 간지러움을 참지 못해 바둥바둥 떠는 것을 김창완씨는 '꽃잎의 흔들림'이라고 봤다. 그게 뭐 별거냐고 하겠지만 세상 풍파를 겪으며 사는 어른이 그런 동심적인 생각을 한다는 건 낙타가 바늘귀를 넘어가는 것만큼 어렵다. 그의 몸 안에 동심이 연둣물처럼 은은히 배어있지 않고서는 그런 발상을 그리 쉽게 할 수 없다. 김창완씨의 세상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동심에 박수를 보낸다.

 

우리나라 어른들 모두 김창완씨가 되길 기대한다.

자, 방바닥에 종이를 펴놓고 그 앞에 엎드려 연필로 또박또박 동시를 써보자. 그 모습이 참말 아름다울 것 같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