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비평

사람을 사랑한 남자, 시인 백석

권영상 2014. 1. 6. 15:16

 

사람을 사랑한 남자, 시인 백석

권영상

 

 

 

 

 

 승용차가 한 대 마을길로 들어왔다.

일을 하다말고 내다본다. 시골살이란 게 그렇다. 하도 고적하니 강아지 한 마리 슬렁슬렁 지나가도 그게 반가워 어디 가냐? 하고 물어보고 싶을 정도다.

차가 동네 삼거리에 선다. 고개를 창문 이쪽으로 빼어 내다보니 사람들이 모여서 있다. 차에서 누가 내린다. 머리에 털모자를 쓴 나이를 자신 분이다. 그를 둘러싸고 사람들 대여섯이 서 있다. 누가 먼데 출입을 하고 오시는 길인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인사를 하거나, 팔짱을 끼고 머리를 주억거리거나, 얼굴이 지워지도록 푸른 담배 연기를 뿜으며 서 있다. 나야 안성에 내려와 산지 얼마 안 되니 무턱대고 마을사람들 사이에 끼일 게재가 못 된다. 나는 나이 먹은 사내들을 내다보는 것만으로도 어떤 편안한 기쁨을 느낀다.

 

 

 

졸레졸레 도야지새끼들이 간다.

귀밑이 재릿재릿하니 볕이 담복 따사로운 거리다.

 

잿더미에 까치 오르고 아이 오르고 아지랑이 오르고

 

해바라기하기 좋은 볏곡간 마당에

볏짚같이 누우런 사람들이 둘러서서

어느 눈 오신 날 눈을 치고 생긴 듯한 말다툼 소리도

누우러니

 

소는 기르매 지고 조은다.

 

아, 모도들 따사로히 가난하니.

 

 

나는 저기 저 삼거리 풍경에 맞는 백석의 시를 찾았다. 그래. 이 시가 그들의 모습과 맞다. ‘남행시초 4’라고 부제가 달려있는 “삼천포”라는 시지만 이 시의 제목을 내가 지금 내다보고 있는 ‘율곡리 삼거리’라고 붙인 대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장면이다.

 백석은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시인이다. 그의 시에는 볏짚 같이 누우런 얼굴의 사내들이 있고, 누우런 얼굴의 사내들이 주고받는 흙냄새 나는 육성이 있다. 그래서 백석의 시를 거름내나는 밭에다 던지거나, 욕지기 난무하는 시장판에 던져놓으면 그냥 흙이 되거나 난장의 비린 생선도막이 되고 말 것 같은 친화력을 가진다. 농사꾼의 허리춤 담배쌈지에 끄달려가서는 담배연기로 타오르거나 주막의 막걸리 한잔이 되고 말지도 모른다. 그만치 그의 시는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밑바닥에서 출발한다. 시의 근원이 외롭고 쓸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애달픈 삶에 있다.

 

 

 

정지용이나 김기림의 시가 서울의 한복판에서 반짝이며 태어난다면 백석의 시는 평안도의 산골집 아니면 어둑한 주막에서 태어난다. 그의 시는 글 모르고, 세력 없는 이들의, 코앞에 닥친 아픔을 만져주는 데 있다. 그러기에 한번만 들어도 삶의 상처를 위로받기 쉽게 짜여 있다.

농사를 지어먹는 친숙한 아저씨의 이야기를 닮았다. 어떤 정황을 아주 눈에 선하게 떠오르도록 언어라는 수단으로 찬찬히 그림을 그려준다.

이 시도 카메라가 볏곡간 주변을 쭉 훑듯 시인의 눈이 그 주변을 더듬는다. 도야지새끼들 졸레졸레 가는 거리를 시작으로, 잿더미를 거쳐 해바라기하기 좋은 볏곡간과 그 앞에 둘러서서 이야기를 주고받는 마을 사람들을 비춘다. 그러고는 등짐을 져나르다 온 소를 프레임 속에 넣는다.

 

 

 

 

이 프레임에 담긴 미장센들은 모두 흙에 발을 대고 사는 가축들이거나 사내들이다. 이들이 지금 말다툼을 하고 있다 해도 조을고 선 누렁소처럼 마냥 한가롭기만 하다. 백석의 말처럼 ‘아, 모도들 따사로히 가난한' 사람들의 풍경이다. 이게 백석의 내 동족을 사랑하는 법이 아닐까 한다.

졸레졸레 가는 도야지새끼들, 함북 내리는 봄볕, 일하다 잠깐 쉬고 있는 소…….

통영 여자, 박경련을 찾아가는 도중의 삼천포는 그가 태어나 살던 함흥과 달리 따뜻하고 풍족해보였던 모양이다. '햇빛이 담북 쏟아지는 마을은 비록 가난할지라도 그 풍요한 볕으로 하여 정겹다', 이게 백석의 사람을 사랑하는 머릿속 배경인 듯하다.

 

 

 

 

“삼천포”를 읽고 창밖을 내다보니 동네 사람들이 다 없다. 어느 집으로 몰려가 소주를 한잔 할지도 모르겠다. 동네집이라봐야 여섯 집이다. 그 여섯 집 중에 타지에서 들어온 목수 최씨 아저씨가 있고, 얼굴만 아는 분이 있고, 나머지 네 집은 토박이분이다. 호밀밭 건너편 할머니는 우리 옆집 양형의 고모가 되시고, 파란 지붕 집은 고모할머니의 사촌이시고, 양형의 옆집은 양형의 고모네 밭을 얻어짓는 먼 동생뻘이다. 다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이웃들이다. 기왕에 모였으니 뜨뜻한 안주에 소주라도 한잔 해야하지 않겠는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백석의 시에서 소주 냄새가 난다. 함께 소주를 마시고 싶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있다.

눈 내리는 밤 무연히 내리는 눈을 보며 ‘나’는 나타샤를 사랑한다. 나만 나타샤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어데서 흰 당나귀도 눈 내리는 밤이 좋아 ‘응앙응앙’ 울고 있는 밤이다. 내가 나타샤를 사랑하지만 않았어도 오늘 같은 밤엔 눈이 내리지 않았을 텐데, 그만 쓸쓸히 눈이 내려 나는 먼 이국의 여인을 사랑하고 만다.

 

 

 

 

그런데 더욱 쓸쓸한 것은 이런 밤, 내 곁에는 나타샤가 없다는 것이다. 있으려면 그 여인은 러시아의 어느 광활한 소설 속의 여인이어서 나는 홀로 소주를 마실 수밖에 없다. 마실 거면 당나귀를 타고 눈길을 헤치며 가다가 어느 막다른 길 끝에 놓인 가난한 마가리에 들어가 마신다. 눈이 내리면 백석은 그렇게 외롭다.

백석의 고향은 외딴 ‘마가리’였으나 그는 늘 먼 이국을 꿈꾸었다. 그는 평북 정주의 진한 사투리로 시를 썼지만 그의 영혼은 유랑민처럼 먼 국경선 밖을 떠돌았다. 남쪽의 시인들이 프랑스와 영국과 더블린과 도이치를 사랑했다면 백석은 그들과 달리 사철 눈 내리는 북쪽 러시아를 사랑했다. 그는 러시아 문학을 번역할 만큼 러시아어조차 사랑했다. 고골리와 뿌시낀, 체홉의 문학 언어와 사회주의까지도 사랑했다.

 

 

 

그가 누구든 나라 없던 시절, 먼 이상을 위해 ‘더러운’ 세상과 싸우는 일은 외로웠겠다. 나타샤와 흰 당나귀와 소주를 마실 수밖에 없는 쓸쓸한 외로움 뒤에, 끝내 조국은 해방이 됐다. 그러고 다시 일어난 민족전쟁 뒤에도 백석은 홀로 추운 북쪽에 남는다. 가난해도 따사로운 정으로 사는 그쪽 땅의 사람들을 백석은 너무 사랑했을지 모른다. 그리고 사회주의라는 손수건만이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리라 믿었던 것 같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백석은 사회주의와 살다가 끝내 사회주의의 그림자에 밟혀 숨을 거두었다. 겨울 햇빛이 뽀오얗게 내리는 오늘, 백석의 나타샤를 다시 생각한다.

 

 

 

그 시절, 백석은 나타샤가 그리워 소주를 마셨고, 박인환은 목마를 타고 떠난 애덜린 버지니아울프를 그리워하며 술을 마셨다. 사내들에겐 남몰래 가슴에 숨기고 사는 여인이 있다. 그 여인은 만나려야 도저히 만날 수 없는 아득한 섬에 산다. 우리가 가끔 홀로 술을 마시는 것은 내 영혼 속에 머무는 그 여인과의 깊은 입맞춤이 그립기 때문이다.